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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부두애 Apr 26. 2021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

푸구가 아내를 좋아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여기저기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이곳저곳에 치어 다니는 그런 뻔한 직장인의 일상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올 때면 먼저 와있는 아내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푸구(푸돌이와 방구)가 있습니다.

엉아 와쏘?(아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방구)

고생한 남편을 위해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아내와 어기적 어기적 걸어와 "엉아 왔오?"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방구와 푸돌이. 오늘은 조금 늦게 퇴근했더니 녀석들은 이미 아내의 품에서 잠들어 있네요. 아기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일지, 이 노견 녀석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살금살금 다리 뒤꿈치를 들고 걷습니다.


그러다 제 저녁 식사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식 냄새가 솔솔 방구와 푸돌이의 코를 간질일 때면 고개를 벌떡 들곤 합니다. 엉아가 반가운 건지, 아니면 맛있는 음식 냄새가 반가운 건지. 그건 굳이 따지지 않으렵니다. 당연히 후자이겠지만 전자라고 생각하렵니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캠핑장에서 푸구와 함께

저희 집과는 꽤 거리가 떨어져 있는 충북 예산의 반려견 전용 캠핑장에 2박 3일로 놀러 가 이 녀석들과 신나게 놀았던 기분 좋은 기억들. 그곳은 텐트별로 울타리가 쳐져있어서 사교성 없는 푸돌이도 마음껏 풀밭을 뛰어놀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죠.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에는 녀석들을 텐트에 재우고 불멍과 함께 밤하늘에 무수 많이 떠있는 별들을 보며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속으로 되뇌곤 했습니다.

 

어느 날은 방구가 새벽에 갑자기 깨 '낑낑' 크게 울기 시작해 급히 응급실로 이 아이를 데리고 간 날도 있었습니다. 췌장염이 심해져서 통증을 호소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에는 얼마나 놀라고 진땀을 뺐는지요. 우왕좌왕 정신 못 차리는 저와 달리 이번에는 아내가 중심을 굳게 잡아주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방구 녀석, 지금은 언제 아팠냐는 듯. 여전히 누나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울부짖는 귀여운 말썽꾸러기입니다.

병원 응급실 갔다 돌아온 방구

아 참, 이번에 검사하면서 알았는데 19살 방구가 선천성 대동맥 협착증을 앓았다고 하네요? 한 번도 그런 병을 앓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 아내는 그 얘기를 듣자 굉장히 당황스러웠다고 합니다. 미리 체크하지 못한 본인 잘못이라는 생각도 들었겠지요. 참 좋은 반려견 보호자인데 속상했을 것 같아 덩달아 저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참 다행인 것은 대동맥 협착증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그리 오래 살지 못한다는데 방구는 '불사신'입니다. 19년째, 아주 슈퍼 노견으로 잘 버티고 있으니깐 말이죠.


아내와 저의 바람입니다만 이 녀석이 20살을 넘겨서까지 우리 곁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불사견'의 모습으로요. 이제는 대동맥 협착증에 관련된 약을 먹으니 확실히 방구의 호흡이 훨씬 편안해 보여 참 다행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하나 있는데요. 유재석 씨와 조세호 씨가 MC로 나오는 [유 퀴즈 온 더 블록]입니다. 근데 많은 출연자들이 그곳에 나오면 꼭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재석 씨는 참 경청을 잘하시는 것 같아요"


한 두 명이 하는 얘기가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유재석 씨는 큐시트(손에 든 진행 카드)를 들고 있음에도, 다음 질문을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출연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적극적'으로 공감해주고 경청해주는 모습을 보입니다.


사실 듣는다는 게 '적극적'이기 결코 쉽지 않습니다. 교과서적인 표현으로 맞장구를 친다든지, 조그마한 리액션을 해준다든지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지만, 진짜! 찐! 경청자는 그냥 듣고만 있어도 말하는 이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런 느낌이 사람을 참 편안하게 하는 매력인 것 같습니다.


말을 많이 하고 잘하는 달변가들은 세상에 널렸지만 다른 이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들어주는 경청자는 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내가 푸구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참 그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저는 방구가 일어나서 여기저기 걸어 다닐 때면 녀석이 그냥 잠시 잠에서 깬 모양이구나 싶은데, 아내는 방구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조그맣게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바로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다

"어구~ 엉아가 방구 목마른데 안챙겨줘쏘? 인누와~ 누나가 물 주께"


신기합니다. 방구가 물 근처에는 전혀 가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이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요?

이 뿐만 아닙니다. 기저귀를 보지 않았는데도 방구의 표정만 봐도 기저귀를 갈아야 할 타이밍을 알아챕니다.


나름대로 아내를 면밀히 관찰해보니, 사실 아내는 아주 적극적으로 푸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라는 것이 사람처럼 '언어'의 형태는 아닐지 몰라도 표정, 손짓-발짓, 눈빛, 울음소리. 이 모든 것들을 '적극적'으로 아내는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생각해보면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한들, 그 속마음을 꼭 말로 다 얘기하지는 않는데, 아내는 그런 점에서 참 귀신같습니다. 제 표정만 봐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늘 신났는지 슬펐는지 바로 눈치챌 정도니깐요.

제가 아내를 사랑하듯 그래서 푸구도 아내를 사랑하나 봅니다. 잘 들어주는 사람, 푸구의 모든 이야기에 공감해주는 사람. 그런 보호자가 아내 말고 또 있을까요? 저 같은 허접이가 개호구 아내를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나 봅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본받아 내일은 조금이라도 푸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도 언젠가 저를 아주 깊이 사랑하는 날이 오겠죠?


아! 사실 그런 날이 오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겠네요. 그냥 이 아이들이 아내와 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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