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비행기
나는 비행기를 공부하는 공학도.
비행기가 좋아해 시작한 공부지만
내 주 관심사는 사람에 있다.
비행기와 다큐멘터리를 둘 다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행기 관련 다큐멘터리를 챙겨보게 되었다. (단순하긴) 비행 다큐라 하면 특정 보여주며 '첨단 기술! 와!'하거나'이 비행기는 대단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사실 이런 다큐멘터리는 내용에 긴장감이 없어 몇 편 보다보면 질려버리기 일쑤다. 그러던 와중 네셔널 지오그래픽 프로그램을 이리저리 찾아보던 중, 나의 눈길을 끈 프로그램이 있었으니, 바로 내 현재의 진로에 지대한 영향을 준 Air Crash Investigation 되시겠다. (한국 채널에서는 '항공 사고 수사대'라는 이름으로 방영)
프로그램의 구성은 단순하다. 실제 항공기 사고 사건들을 바탕으로 각 사건들을 재구성해보고,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대원들이 등장해 그 사고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대형 항공사고들은 그 마지막 흔적조차 제대로 남기지 않는데, 이에 하루 빨리 원인을 규명해야 하는 수사 대원들의 활약은 이미 형체를 잃어버린 항공기와 망자들 가운데서 시작되기 마련.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조그마한 단서들을 모아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원인을 빠르게 규명해 또 다른 희생을 막아야한다는 압박이 긴장감을 조성한다.
모든 사고는 고유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어쩜 이렇게 서로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환경 속에서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다양한 결말에 이른다. 덕분에 매 회차가 새로워 열심히 정주행하는 데 무리가 없다. 하지만 매번 색다르다 보니 툭하면 장기전이 되는 수사 과정 속에서 씨름하고, 가끔 뻔해 보이는 것들도 행여나 다른 게 있을까 끊임없이 재고해보는 수사관들이 안쓰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사고라는 게 이렇게 다양하다면, 어떤 공통점을 찾아 사고를 한 번에 대폭으로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다양한 사건들을 흡수하며 프로그램을 즐겨보던 중, 어쩌면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당수의 사고는 일차적으로 외부 환경에서 문제가 발생한 후 그 상황에 대응하다가 사람이 실수를 저질러 일어난다. 즉,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마지막 방아쇠는 결국 인간이 당기는 일련의 과정을 따른다는 것. 급격히 기상이 악화되거나 특정 장치가 고장이 나는 등 인간을 당황케 하는 외부 자극이 주어진 뒤 인간은 종종 혼돈에 빠져 잘못된 판단과 대처를 하고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넌다.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심각한 결함에 의해 사고가 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기계적 결함 여부와는 관계 없이 결정적 순간에서의 판단 실수로 발생했다. 에피소드마다 아쉽지 않은 사건이 없었다. 저 상황에서 저런 판단을 했다면, 당황하지 않았다면, 소통이 잘 일어났다면, 한 번 더 의심해 보았다면..
마지막 방아쇠를 인간인 조종사가 당겼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조종사를 비난하고 '훈련을 더 열심히!'만을 외칠 문제는 절대 아니라 생각한다. 인간의 실수는 사고의 원인이면서도 외부 자극의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 기계가 고장나거나 주변 환경이 생소한 상황에 빠진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다. '실수'라는 것이 그저 비난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결과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공학적인 결함을 줄이는 것은 곧 안전이라는 인식은 오래 전부터 있었으며 그 노력의 결과로 순수 기계적 결함만으로 인명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백만분의 1 단위로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사고 소식은 끊임없이 들려온다. 이는 사람의 판단에 비행기의 생존 여부가 달렸다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시사한다.
사고가 일어나는 과정 속에 사람의 '고장'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판단에 안전이 걸린 시대가 왔다는 것. 이 두 사실은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불필요한 희생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는 확신을 내게 심어주었고 '기계적 결함을 줄이는 것이 곧 안전'이라는 내 생각을 뒤바꾸기에 충분했다.
사람의 행동을 연구하면 어떤 느낌일까. 관심은 있는데 뭔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 지 모르겠어서 딱히 파본 적은 없다. 비행기랑 사람의 인지 능력은 예전부터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비행 역사 120년 간 '실수'로 잃은 비행기와 가여운 목숨들이 너무 많다..) 연구 분야로서 관심을 받게된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 하다. 마침 관련 수업이 열렸다. Aerospace human machine system.
수업의 일환으로 나의 행동을 분석하는 실험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기계가 사람을 시험하고, 사람의 반응에 점수를 매기고, 인간 행동을 수식화하고. 피실험자가 된 나는 기계가 보여주는 화면에 뭔지도 모르고 따라다니고, 옆방의 컴퓨터는 데이터를 보며 나를 파악한다니, 주객전도도 이만한 게 없다.
공대 다니면서 배웠던 것과는 아예 탐구 방향 자체가 정반대다. 이미 확립된 정설이 많지 않아 대부분 가설에서 시작, 탐구 후 체계화 과정이 대부분이다. 체계화가 덜 된 만큼 방향성이 모호한 느낌도 없잖아 있지만 그만큼 밝힐 것이 많고 이론화될 여지가 많을 것 같다. 또한 여러 학문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커버하는 분야가 넓고 연결되는 내용이 방대해 줄기를 파악하기 힘든 면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 실용적이면서도 신비로운 게 또 있을까.
사람의 행동 속에서 규칙을 찾고 이론화할 수만 있다면 궁극적으로 사람의 장점은 지키면서 단점은 극복하는 대표적인 예시가 될 거라 생각한다. 모호하니 실적을 내기 힘들고, 그러니 이 분야로 가지 말라는 현실적 조언도 무시하긴 힘들지만, 다가가기 힘든 만큼 매력이 폭발하는걸.
2016.12.24, 스키폴 공항
크리스마스 이브, 공항 밤샘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