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불원정대, 그 여정의 시작
비행기가 취소되었다. 빌어먹을.
우리 가족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처음 이 문자 메시지를 봤을 땐 스팸문자인 줄 알았다. 아마존닷컴에서 무언가가 결제되었다며 메시지가 날아왔을 때 여기저기 검색해 보니 보이스피싱이라기에 이번에도 또 그런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디 보자, 그나저나 내가 이 날짜에 보라카이 가는 건 어찌 알았지? 싶어 조금 더 살펴보니 어쩌면 이번엔 보이스피싱이 아니라 실제 상황인 듯했다.
응? 비행기가 취소되었다고?
그제야 깜짝 놀라서 부랴부랴 사이트에 접속해서 예약현황을 살펴보니 정말로 비행기가 취소되어 있었다.
쉬벌...누구 맘대로?
정말이지 욕이 절로 나왔다.
Flight Cancellation Notice라고 보내온 메일에는 무료로 항공편을 변경해 준다고 했지만, 내가 가려고 했던 날짜엔 비행기가 없었다. 시간 변경도 아니고, 경유도 아닌, 그냥 아예 그 날짜 비행이 통째로 사라진 거였다. 출발 예정일을 살짝 바꿔 그 전날로, 그 전전날로, 혹은 그 다음날로, 그 다다음날로, 또 그 다다다음날로도 검색해 봤지만 그즈음 보라카이로 가는 비행 자체가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이럴 때 쓰는 요즘 말이 "킹받네" 라고 배웠는데 난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이라 "개빡치네"가 먼저 나와버렸다. 나지막이 쉬벌... 이라고도 한번 더 중얼거렸다.
항공권을 구매한 후 그 날짜로 숙소 예약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테라스에서 수영장으로 바로 연결된 방이 20만 원이나 싸게 나왔기에 취소불가 조건이긴 했지만 어차피 갈 거니까, 하며 항공권을 구매한 그날 숙소 결제까지 끝내버렸다.
무료 변경 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비행기를 띄우라고. 비행을 하라고! 그냥 일이나 하라고!! 이그읏 뜨라아아~!!!(대폭발)
정수리를 향해 땅콩을 집어던지며 있는 대로 행패 부리고 싶었는데 나를 상대해 주는 건 AI 상담원 대머리 Bo 뿐이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다시 한번 더 쉬벌...이라고 중얼거리며 입술을 씹었다.
Bo는 너무 똥멍청이라 대화하다 보면 속에 천불이 났다.
응, 맞아. 네가 타고 갈 비행기가 취소되었어. 그렇지만 다른 비행기로 바꿔줄게. 아, 물론 공짜야.
선심 쓰듯 쫑알거리고 있었지만 내가 바꿀 수 있는 비행기가 없었다.
-바꿔줄게
-내가 원하는 날짜는 이 날짜야.
-바꿔줄 테니 비행기가 있는 날로 말해
-망할 놈아, 이 날의 비행기여야 한다고
-바꿔줄 테니 날짜를 다시 말해
-비행기가 아예 없는데 뭘 바꿔준다는 거야? 븅신아!!!!!!!!!!!!!!!!!!!!!!!!!!!!!!!!!!!!!!!!!!!
라고 소리쳐봤자 Bo는 부처님 같은 얼굴로 (쳐)웃기만 하면서 버퍼링에 걸린 듯 내내 같은 말만 했다. 결국 환불을 받고 다른 항공권을 구매해야 했다.
Bo와 한참을 더 씨름하다가 간신히 환불에 성공했지만, 이게 진짜 성공인지는 내 카드가 취소되어 봐야 아는 것이다. 검색해 보니(바보같은 나는, 왜 항공권 구매 전에 미리 검색해보지 않았을까) 에어아시아는 일방적인 비행 취소로 유명한 곳이었고 1년이 지나도 환불받지 못하고 있다는 글도 꽤 보였다.
쉬벌. (나의 1년 치 '쉬벌'을 이 일로 다 쓰고 있는 중이다. 굳이 맹세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맹세코 '쉬벌'은 내가 즐겨 쓰는 말이 아니다. 평소 내 분노는 '개빡치네'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표현 가능했다.)
이 와중에 숙소 역시 절대 취소가 안된다고 한다. 항공사의 일방적인 결항 통보로 보라카이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며 사정해 보았지만 안된다는 답만 돌아왔다.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다.
1. 에어아시아에 결항확인서를 받아낸 후 보라카이 숙소에 직접 메일을 보내 한번 더 취소 요청을 해본다. 최대한 비굴하고 낮은 자세로 쌍무릎 꿇고 싹싹 빈다. 에어아시아와 헤난에서 취소해주면 그 후 항공권과 숙소를 다시 예매한다.
2. 숙소가 끝내 취소되지 않는다면 매일같이 항공권을 검색하여 어떻게든 그 날짜로 항공권을 다시 예매한다. 단, 지금처럼 3배가 넘는 가격이거나 경유여서는 안 된다.
3. 보라카이에 가지 않는다.ㅠㅠ 그리고 평생 잊지 않고 끈질기게 두고두고 에어아시아를 저주한다.
보라카이에 도착하자마자 레게머리를 해야지, 크롭티를 입어야지, 남편이랑 석양을 배경으로 스냅사진을 찍어야지. 하나하나 세웠던 계획들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다. 전부 다 꿈이라고 해줘. 쉬벌.
일단은 1번을 목표로 환불원정대, 그 여정을 시작해 본다. 빌어먹을 에어아시아. 진짜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