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잭맨, 크리스천 베일이 수놓는 1900년대 영국 마술계
마술을 소재로 한 영화 중에 지금 머리에 바로 떠오르는 것은 엠마 스톤과 콜린 퍼스 주연의 'Magic in the Moonlight'와 Now you see me 시리즈입니다. 전자는 마술에 관심이 있어서 봤다기보다는 엠마 스톤 주연의 우리 앨런 감독 영화여서 봤었고, 후자는 사실 마술 영화라기보다는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나 '도둑들' 같은 범죄 액션 영화죠. 두 영화 모두 마술을 서브 소재 정도로 사용하면서, 한 영화는 신비롭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사용했고, 다른 영화는 긴박하고 화려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마술을 어떻게 사용했을까요. 이 영화가 개봉된 2006년은 벌써 15년이 훌쩍 지났지만, 영화의 배경이 1900년대이다 보니 방금 개봉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영화입니다. 휴 잭맨과 크리스천 베일이 조금 젊어 보인다는 것이 지금 보기에 눈에 좀 걸린다고나 할까요. 스칼렛 요한슨도 블랙위도우 느낌보다는 한창 어리고 발랄해 보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많은 영화들이 그럴법한 과학적 이론들에 그 만의 상상력을 더해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 때문에 영화 내용을 구체적으로는 다루지 않을 예정입니다. 어디까지 진짜고 어디까지 상상력인지 각자 생각하는 것도 감독이 계획한 영화를 즐기는 방법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인셉션의 엔딩이 디카프리오의 꿈 속일지, 실제일지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지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죠.
두 마술사의 쫓고 쫓기는 끊임없는 집착과 복수, 상대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그 보다 두 발자국을 먼저 나가야 하는 압박까지 배우들은 감독이 의도한 감정들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는 마술 장면을 보여주면서 깜짝깜짝 놀라게 하기도 하고, 관심을 조금 끌어 가기도 하지만, 중반을 넘어 뒤로 갈수록 마술 장면은 점점 줄어들고 두 마술사의 삶과 내면을 드러내는 표정에 점점 더 화면 비중이 늘어납니다. 마술이 소재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두 라이벌의 집착과 경쟁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죠.
시간을 교차해서 현재에서부터 과거로 돌아가서 몇 개의 시간대를 오가면서 둘의 관계를 풀어가는 모습이 마치, 최근 놀란 감독의 영화 테넷의 그 구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엔딩 근처의 사건을 먼저 툭 던져주고, 과거의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어쩌다가 처음의 그 상황에 빠지게 되었을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죠. 어쩌면 이 영화에서 마술사는 두 배우가 아닌 스크린 뒤에서 관객의 시선과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 놀란 감독이 아닐까요.
1900년대 런던의 극장과 거리, 골목들을 바라보는 모습도 재미있습니다. 자동차가 아닌 마차가 돌아다니고, 위생시설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잿빛의 도시.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극장의 실내 분위기. 조끼에 타이, 스카프까지 두툼하게 챙겨 입은 신사들. 저 때에 저곳에서 저렇게 살라고 하면 불편한 것 투성이겠지만, 왠지 분위기 있고 그럴싸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네 역사가 아닌 탓에, 각 화면들이 충분히 고증되었는지 알아챌 만큼 식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화려한 색감의 요즘을 그린 화면이 아닌 무채색과 어두운 색으로 차분하게 그려진 옛 런던을 살펴보는 것도 두 시간 남짓의 영화를 즐기는데 큰 즐거움을 보태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