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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선임 Aug 24. 2021

칼 같이 사는 삶

일하는 엄마는 칼 같이 산다.

나는 출근을 할 때 최소 20분 전에는 미리 도착해서 여유있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선호한다. 정시에 맞추어 움직이다보면 출근시간에 예상치못한 일이 생겨서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지각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퇴근도 중요한 약속이 있지않으면 그 날 업무를 대강 정리하고 내일 업무를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고 여유롭게 퇴근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는 옛 일이 되었네.


이제는 칼 같이 산다.


8시 50분에 베이비시터 선생님이 집에 오시면 튼튼이와 인사하고 9시에 출근길에 나선다. 이 때부터는 망설이지않고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스마트폰을 보다가 천천히 걷다가는 지하철 탑승, 환승이 하나씩 늦어져서 지각 확정이다. 내 출근시각은 10시인데, 거의 매일 9시 50분 전후로 도착한다. 그 다음 지하철을 타게되면 10시 정각에 도착하는데, 그 코스는 심장이 쫄깃해서 엄두가 안 남.


퇴근할 때 더 정신을 바짝차리고 해야한다. 나의 퇴근시각은 5시인데, 일에 집중하거나 몰두하다가는 5시 13분 지하철을 놓치게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4시 40분 정도가 되면 나는 오늘 업무를 정리정돈한다. 남은 20분 정도를 바로 끝내버릴 수 있는 간단한 메일에 회신하고 퇴근시각을 맞이한다. 5시가 되면 회사 건물 밖을 빠져나와서 지하철역까지 또 부지런히 걸어가야한다. 부지런히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하면 5시 57분 정도가 된다. 후하. 글만 봐도 숨이차다.


출퇴근 시각만 칼 같은 것이 아니다.


출산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내 업무시간은 2시간 단축이 됐다. 하지만 회사에서 2시간 단축하는만큼 업무를 2시간만큼 절대로 줄여주지 않는다^^ 다른 방법이 없는 선택이었지만, 원래도 적지않았던 업무를 이제는 하루 6시간에 다 끝내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OMG!


절대로 6시간 근무시간에 다 커버할 수 없다. 8시간 근무하던 시절에도 한달에 서너번은 야근을 느즈막히 하곤 했었거든. 그래서 처음 복직하고나서 적응할 때는 앞이 캄캄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예전에 나는 주변에 협조적인 태도로 일을 했었는데, 이제는 말 그대로 내 살 길 찾기도 바빠져서 업무하면서도 칼 같이 자른다.


내 것만 챙기고 내 것만 관심있는 그런 삶보다는,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이니까 우리 팀 업무에 주인의식도 가졌었고, 타 팀에서 협조해 달라고 하는 부분들도 적극적으로 임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미안하고 아쉽지만 내 업무가 펑크나지 않는 것이 1차적인 목표가 되었기에, 나는 칼 같은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기적인 태세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예전만큼 다른 사람의 상황에 귀 기울여주는 여유는 내게 이제 없다.


내 업무도 칼 같이 잘라내고 있다.


내 담당 업무도 마찬가지이다. 업무를 하다보면 장기적인 과제들이 생기게 마련인데, 요즘은 지엽적으로 일을 하는 것도 벅차다. 나는 일개 직원이지만 내 담당 업무의 향후 매출 추세도 그려보았었고, 지금 업무 흐름 상의 내재적인 리스크도 대처할 방안을 고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칼 같이 단기적인 성과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다, 내 업무라도 제대로 끝내는 것이 먼저다, 라고 스스로 달래보기도 하지만 일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절대적인 시간은 제한적이고, 내 하루 중에 내가 해야할 역할을 두 가지가 되기 때문에, 홀몸이었던 시절처럼 마냥 일 욕심을 내거나 자아성취를 도모하기는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몫에 대한 책임감은 칼같이 지킨다.


내가 칼 같이 산다고해서 해야할 일을 안 하고 널부러뜨린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고 퇴근하는 기분이 얼마나 찝찝한지. 그래서 일이 많이 밀린 날에는 퇴근하고 집에와서 튼튼이 밤잠을 재우고나서 두세시간 집중해서 일의 페이스를 따라잡아 놓는다.


그리고 근무시간에 여유있게 차 한 잔도 마시고 하던 시간은 다 칼 같이 잘라버리고 정말 1분도 허투로 쓰지 않으려고 한다. 도시락을 싸가는 날에는 점심을 일찍 먹고 시간이 매우 많이 남기때문에, 10~20분 정도 오후 업무를 먼저 시작한다. 이 정도만 해도 업무 효율성이 확실하게 높아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일에 대한 책임감을 놓을 수는 없다. 내 소중한 월급... 녹을 받으면서 일을 대충한다는 것은 도둑질이나 마찬가지이다. 튼튼이를 키우고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원동력이 나의 월급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이게 바로 내가 (이 전보다는 줄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을 붙들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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