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회사가 인력이 부족해서 자신의 직책과 상관없는 포지션으로 비행에 불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아직 이코노미 클래스 승무원이라 다른 역할을 할 순 없지만, 사무장이 부사무장으로 온다던지 부사무장이 이코노미 클래스 승무원으로 일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번 비행에서는 사무장이 부사무장으로 불린 경우였는데, 보통 이런 경우는 이코노미 클래스 서비스를 잘 몰라서 서로 우왕좌왕 하기 일쑤다. 여기에 갓 비행을 시작한 신입 승무원들까지 있으면 그나마 비행 조금 오래 한 내가 독박(?)을 쓰게 될 때가 있다. 사실 요새는 이런 경우가 많아서 몸도 마음도 지치고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로마 레이오버 때, 심지어 55시간짜리라서 너무 설레고 좋았는데 비행 자체만으로는 사실 힘들었다. 사무장이 부사무장으로 불려 온 경우였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았고 서비스만 마치고 비즈니스 클래스에 내내 있으며 그 나라 출신답게 게으름을 보여줬더랬다. (결국 내가 독박 비행)
반면 이번 멜버른 비행 때는 똑같이 사무장이 부사무장으로 불려 온 경우였는데 정말 달랐다. 처음엔 브리핑을 뭐 저렇게 길게 하나 싶었다. 서비스 역할까지 세세하게 분담해서 알려주는데 이 정도까지 해야 하나, 엄청 깐깐한 스타일인가 보네 싶었다. 이제는 비행한 지 좀 돼서 사무장이나 부사무장이 어떤 스타일인지 브리핑만 봐도 감이 대충 온다. 브리핑으로만 봤을 때는 그녀와의 장비행이 쉽지 않아 보였다.
장거리 비행은 응급 의료 상황이 종종 생기는 편인데, 이번 비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리더십은 위기 상황에 빛을 발했다. 전문 혈압 측정계를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녀가 미리 세세하게 역할 분담을 해놓은 덕분에 일손이 한 명 부족했어도 별 무리 없이 서비스를 마칠 수 있었다. 물론 응급 상황 처치도 그녀가 나서서 처리했다. (가끔 안 하려고 꾀부리며 다른 승무원 시키는 사무장이나 부사무장 있음) 그리고 “역할 분담을 잘 배분해 잘 시키는 것”이 리더로서 얼마나 중요한 지 느끼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경력이 높은 순서대로 갤리 담당을 시키고, 이 갤리 담당자에게 약간의 권한을 부여해서 기내 담당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잘 시키라고) 하고 있다. 난 뼛속부터 한국인이다 보니 누구에게 시키기보다는 내가 그냥 하는 편이었고, 그러다 보니 나 혼자만 일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은 눈치껏 “뭐 도와드릴까요?” “이건 제가 할게요”라고 하는데 외국애들은 얄짤 없다. 도와달라고 안 하면 내가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절대 안 도와준다. 그러다 보니 살아 남기 위해서 요구하기 시작했다.
잘 시키는 게 정말 리더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일까 생각이 들었었다. 나이 먹으니 누가 시키는 게 듣기 싫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비행을 통해서 사람이 많을 때 적재적소에 인력을 배치하고 잘 시키는 게 좋은 리더십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웠다. 이런 사무장이라면 매일 같이 비행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