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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Jun 02. 2022

오늘도 비키니 꿈을 꾸지

비키니 한 장, 책 한 권 챙겨 떠나는 물놀이


 처음 감방에 갇혔을 때, 가장 힘들었던 일은 내가 여전히 자유로운 사람처럼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갑자기 해변으로 가 물가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파도의 물결이 내 발에 처음 닿는 소리, 내 몸이 물속에 잠겨 편안해지는 느낌을 상상하노라면 갑자기 내가 감옥 벽 속에 갇혀있음을 절실히 실감하곤 했다.

알베르 카뮈,「이방인」, 1942


 수화기 너머의 상담사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코를 후비면서 오늘 주문한 상품이 로켓 배송으로 내일 도착할지 찾아보고 있지 않았을까? 회사와 업무 협약을 맺었다는 정신건강센터 소속 상담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직원 정신건강 관리를 위한 스트레스 설문지를 제출한 지 한 달쯤 된 참이었다. 분석 결과 경미한 우울 증세가 보이니 전화 상담을 해보자고 했다. 상냥한 만큼이나 형식적인 목소리의 상담사였다. 그가 보고 있었을 내 응답지에는 아마 이렇게 체크되어 있었으리라.


- 시도 때도 없는 가슴 두근거림

- 원인 모를 만성 허리 통증과 알레르기 반응

- 이전까지 의욕적으로 임하던 일이 의미 없게 느껴짐

- 사람이 많은 곳(쇼핑몰, 식당)에서 슬프거나 스트레스 받음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눈물이 난다고요? 언제부터 그랬나요?’

‘원래 회사 다니면 다들 이 정도 하지 않나요. 아침에 두통에 시달리고, 모래주머니를 찬 것처럼 걸음이 무겁고, 모르는 전화를 받을 때면 숨이 가빠지지 않나요.’


 물론 아니었다. 2017년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6년째, 마침내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렸음이 분명했다. 슬프다거나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조차 안 들만큼 기력이 없었다. 마치 물, 깊은 에 빠진 사람처럼. 마음이 다시 가라앉으려 했다. 상담사는 형식적인 질문을 이어갔다.


‘평소에 좋아하는 운동이 있나요?’

‘작년까지는 수영장을 격일로 다녔는데, 요즘은 안 가고 있어요.’

‘좋네요. 찬 물에서 하는 운동은 우울감을 완화하는데 도움이 돼요. 계속해보는 건 어떨까요?’


 ‘우울한 기분은 처음부터 인정하고, 잘 다스리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게 돼요.’ 상담사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심했고 정말로 코를 후비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의 조언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바다로 갔다. 수영복 한 장, 소설 한 권 챙겨서.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송정(松亭) 해수욕장

알베르 카뮈, 「이방인」 챙겨 서핑 강습소로


 5월 송정(松汀) 바닷물은 아직 찼다.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 서퍼들도 두꺼운 슈트를 입고 있었다. 몇몇 여자 친구만이 하얀 비키니와 민트색 래시가드를 입고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패들링 하며 서핑보드를 앞으로 밀고 나갔다. 강사는 서핑을 할 만한 파도가 충분하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나로서는 짧은 내 두 팔을 저어 길고 무거운 보드를 움직이는 일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몇 가지 요령만 알면 내가 원하는 방향 어디로든 떠다닐 수 있었다.


 지난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친구들은 내 적금 만기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청첩장을 보내왔다. 결혼하지 않은 친구와 만나면 아파트 청약 이야기를 나눴다. 동료들은 출고가 늦어지는 차, 가망이 없는 주식 이야기를 했다. 모아둔 돈도, 사랑하는 사람도, 살고 싶은 집도 없었던 나는 외로웠다.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어설픈 맞장구를 치며 겉돌기만 하는 나. 내가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오로지 비키니뿐이었다.


 비키니? 알 수 없는 이유로 지난겨울부터 나는 비키니 꿈을 꿨다. 언젠가 동료들에게 발리로 가서 비키니만 있고 헤엄치며 살고 싶어요, 말했다. 그중 한 명이 그럼 돈이 많아야겠네! 하며 바로 다음 화제로 넘어가기도 했다.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지 못하는, 물 위를 떠다니는 사람. 내가 바로 이방인이라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물놀이 가방에 카뮈의 「이방인」을 챙기기는 했지만.


 어제 하루 일로 너무 지쳐서 일어나기가 힘이 들었다. 수염을 깎는 동안, 나는 오늘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수영을 하러 가기로 했다. 전차를 잡아타고 항구 아래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물로 뛰어들었다. 물가에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헤엄을 치다가 전에 우리 사무실에서 타자수로 일했던, 한동안 마음에 품었던 마리 카르도나를 우연히 만났다. 내 생각엔 마리도 나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마리가 부표로 올라가도록 도와주다가 그녀의 가슴에 손이 스쳤다. 나도 올라가 그녀 옆에 누웠다. 장난을 치면서 내 머리를 그녀의 배 위에 눕혔고, 별 말이 없기에 그대로 가만히 두었다. 푸른 금빛이 도는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 뒷덜미에 닿은 마리의 심장이 부드럽게 뛰는 것을 느꼈다.


 왜 누구는 바닷물이라면 질색하고, 누구는 환장을 할까? 인류는 수세기 동안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찬 물을 이용했다. 히포크라테스는 냉수 요법이 피로를 없애준다고 믿었고, 18세기 의사들은 구루병을 치료하기 위해 냉수를 권했다. 하지만 차가운 바닷물 수영이 우울한 마음을 치유하는데 과연 효과가 있는가?


 포츠머스 대학교 마이크 팁튼 교수는 찬물에서 받는 생리학적 스트레스가 오히려 뇌에 이롭다고 한다. 연구에 따르면 15°C에서 10°C 사이의 물에 잠길 경우 심장박동수와 혈압이 증가하며, 노르아드레날린과 코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된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찬 물에 몸을 담글 경우 이러한 호르몬에 익숙해지고, 다른 위기 상황에서 느끼는 비슷한 스트레스를 완화할 수 있다. 격렬한 수영 후 느끼는 황홀한 느낌은 도파민이 분비된 결과이다. 얼굴까지 담그면 신경계 부교감 신경이 활성화되어 몸이 이완하는데 도움이 된다.


 잠시 보드 위에  있는 동안,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고 슈트로 미처 가리지 못한 손등과 발등이 구워지는  느껴졌다.  위에서 피할  없는 뜨거운 햇빛 때문에 꼼짝달싹할  없다.  ,  카드, 원하는 것은 웬만하면 손에 넣을  있는 생활이 이어지는데 나는 권태로움에 사로잡혔다. 사이가 틀어지기 전까지 카뮈와 철학적 동반자였던 사르트르는 말했다. 우리는 자유를 선고받았다.


 자유에는 책임과 기대가 따른다. 이러한 부담감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자유를 빼앗고, 선택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관습과 규칙을 만들었다. 내가 ‘해야 한다 생각하는 ,  직장생활과 가족으로서 의무는 사실 자유라는 무한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선택이다. 쳇바퀴를 도는 일상을 누군가 시켰다고 원망하는 순간 자기기만 상태에 빠진다.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들이고, 선택이 지닌 힘을 인식해야 한다.


 과연 앞으로의 날들을 선택하는 게 가능할까? 선택하면 변할까?


 「이방인」 속 주인공 뫼르소는 엄마를 묻는 날조차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권태로운 인물이다. 어디에도 발을 디디지 못하고 묵묵히 일상을 견딘다. 그는 엄마의 장례식을 참고, 상사의 간섭을 모른척하고, 친구의 장황한 푸념을 묵묵히 듣는다. 하지만 피할 곳 없는 뜨거운 모래사장 위에서 고통스러워하고, 물가에 다다라 마침내 사람답게 군다. ‘발 밑에서 모래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조급함을 잠시 참다가, 마침내 마송에게 말했다. 이제 갈까요? 그러고는 곧장 뛰어들었다.’


 「이방인」은 해변에 드러누워 읽을 만한 한가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참을 수 없는 열기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다. 하지만 카뮈는 짧은 문장 몇 개를 가지고 가장 적확한 묘사로 1백 년 전 카뮈 자신 즉 부드러운 눈매와 주름진 미간, 어딘가 모르게 지친 표정의 그와 나란히 걷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나는 카뮈가 그리는 단순하고 강렬한 유사 현실에 빠져든다. 닻을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기분이 들 때,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소설 속 수영 장면을 거듭 읽는 이유이며, 이 글을 읽을 당신도 바다로 오게 되리라 믿는다.  


5월 어느 날, 물 멍 때리는 친구와 송정 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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