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술탄 Oct 08. 2019

립스틱과 선크림과 젊음

스물한 번째 얼굴 : 나를 빤히 보며 웃던 할머니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 한 할머니의 가방이 눈에 들어다. 가 들었는지 불룩하게 부풀어 있 검정 백팩의 앞주머니 지퍼 활짝 려있는 거였다. 열린 지퍼 안으로 안경 케이스와 꽃무늬 손수건, 그리고 파우치 비슷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듯한 파란 복주머. 뭐 이런 것들이 훤히 보였다.
나는 보통 이런 걸 그냥 지나치는 성격이다. 알아서 하겠지. 가방에서 뭐가 떨어져서 잃어버린다 해도 안 닫고 다닌 본인 책임이니까. 근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그날따라 자꾸만 눈이 갔다. 특히 안경 케이스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열린 지퍼 너머를 불안하게 끄덕대고 있었다. 에라이, 안 되겠다.

“할머니. 가방 지퍼 열렸어요.”

할머니 뒤로 가서 말을 걸었다. 얼굴도 보지 않고 뒤통수에 말을 걸었다.

“어머. 그래요?”

할머니 굳이 돌아보지 않고 가만 계셨다. 닫아줘도 좋다는 무언의 동의겠지. 나는 불룩한 백팩의 앞지퍼를 부여잡고 부르륵 소리가 나게 닫았다.


소리가 끝나자 할머니가 돌아본다. 지퍼 열린 할머니와 지퍼를 닫아준 내 얼굴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어색한 순간. 이럴 땐 그냥 웃는 게 최고지. 생각하며 웃었다.

젊은이가 참, 고맙네, 하며 웃는 할머니에게 아니에요, 라는 멋쩍은 말을 하며 더 웃어드렸다.

이제 그만 이 어색한 미소를 좀 풀고 싶은데, 용건이 끝났을 할머니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내 얼굴을 계속 봤다. 언제까지 웃고 있어야 하 생각하는데, 나는 입꼬리를 더 올려야 할 것 같은 말을 들었다.

“나도 오늘 립스틱 바르려다 말았는데 조금 그래서...
선크림이라도 바르려고 했는데.

립스틱이랑 선크림이랑.”

예? 립스틱이요? 선크림이요?

할머니는 어리둥절해 있는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이놈의 입꼬리는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으면 자동으로 올라가는 센서가 달렸는지 더욱 하늘로 치솟았다.

할머니가 계속 나를 보고 있어서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하나 곤란한 참이었는데 고맙게도 타이밍 좋게 버스가 도착했다. 고개로 꾸벅 인사를 하고 버스를 타는데 웬걸, 할머니도 같은 버스를 탔다. 버스에 탄 후에도 건너편에 앉아 나를  번이나 흘낏흘낏 웃으며 보니 점점 기분이 이상해진다.


내 얼굴이 지금 웃긴가? 립스틱을 너무 진하게 발랐나? 아, 선크림이 허옇게 떡칠이 됐나?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들었다. 거울 속에는 평소와 다른 것 없는 멀건 얼굴 보였다. 선크림은 피부톤과 하나가 되어 튀지 않고 얌전히 들러붙어 있었고, 내 취향을 반영한 립스틱은 심심하면 심심했지 전혀 과할 것이 없었다.


화려할 것도 없고 웃길 것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내 얼굴을 본 후에야 깨달았다. 할머니는 내 얼굴에 바른 립스틱이나 선크림을 본 게 아니구나. 그냥 젊은 얼굴을 본 거구나.

"고마웠어요, 젊은이."

먼저 내리며 할머니가 인사를 해주었다. 젊은이라는 명칭으로 나를 부르고, 버스 뒷문의 두 칸짜리 계단을 한 칸씩 한 칸씩 조심히 디뎌 내. 유리창 너머의 할머니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머무르고 있었다.



누구는 나이의 어림으로, 누구는 나이와 상관없는 열정의 상징으로. 때로는 도전과 새로움으로, 때로는 어설픔과 치기로.

사전의 뜻과는 별개로 사람마다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는 이 젊음이라는 것 앞에서, 우리는 왜 이토록 미소를 짓게 되는 걸까.



생각해보니 그런 미소를 내 얼굴에서 본 적이 있다.
오랜만에 친한 대학 친구와 학교에 갔을 때였다. 간만에 추억에 한 번 빠져보자는 건 핑계였고, 사실 학교 앞 떡볶이가 생각나서 간 거였다.

우리 학교 앞에는 떡볶이 포장마차만 세 개가 줄지어 있었는데, 다른 대학가처럼 상권이 발달한 편이 아니어서 그 세 개의 떡볶이 포장마차를 번갈아 가며 맛보는 게 수업 끝난 우리의 거의 정해진 일과였다.

나는 그중 첫 번째 집을 제일 좋아했다. 달달한 고추장 맛이 제일 진했고, 파가 많았으며, 야채 튀김이 아주 바삭했던 기억이 난다.
이젠 잊혀가는 그 맛을 다시 맛볼 것을 기대하며 갔으나, 포장마차는 없었다. 알아보니 없어진 지 오래란다. 일단 캠퍼스를 좀 거닐면서 새로 생긴 맛집은 없나 서치를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캠퍼스에 들어간 후부터는 핸드폰으로 뭘 검색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 있는 학생들 때문이었다. 약간은 촌스러운 화장. 무슨 의도인지 잘 모르겠는 독특한 상하의 매칭. 예쁘거나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왠지 눈길이 갔다.
결국 맛집 찾는 데는 성의를 들이지 못하고 애초에 떡볶이 먹으러 왔으니 학교 앞의 아무 떡볶이집엘 들어갔는데, 거기서도 그랬다. 입가에 떡볶이 양념 묻혀가며 먹는 학생 둘을 계속 흘낏대게 되는 거였다.

좀 주책인 것 같아서 시선을 거두었는데 그때 떡볶이집 유리문에 비친 나는, 왜인지 웃고 있었다. 내 얼굴에서 립스틱과 선크림을 말하던 그 할머니처럼. 나도 저들에게서 젊음을 보고 있었던 거다.



젊음 앞에 우리가 미소를 짓게 되는 이유. 그건 아마도, 각자 젊음이라 칭할 수 있는 시기를 보냈던 나를 만났기 때문 아닐까.

선크림과 립스틱을 발랐던 할머니의 젊음과, 촌스럽게 옷을 입고 떡볶이 하나에도 행복해하던 나의 젊음. 우리는 누군가젊음을 보며 웃지만 사실 지난 시간의 내 젊음 만나고 미소지었던 거다.
언젠가는 지금 이 순간도 젊음으로 기억되 웃음으로 만나 때가 있을 거다. 시간은 그렇게 앞으로 흘러가 뒤에서 만난다. 이전의 젊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지금을 괜히 서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고, 그 앞에서 울지 않고 여유 있게 웃을 수 있는 까닭이.

그건 그렇고, 할머니를 미소 짓게 한 나의 젊음이 좀 민망하다. 고작 선크림이랑 립스틱 같은 거로 점철된 젊음이라니. 아, 그러고 보니 나를 미소 짓게 한 건 촌스러운 화장이랑 옷 센스였지. 젊음이 원래 그런 건가 보다.






<101개의 얼굴에 대한 보고서>

매일 옷깃 스쳐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기록입니다.

낯선 얼굴들이 건네는 안 낯선 이야기.



매거진의 이전글 '야' 말고, 예쁜 이름으로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