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술탄 Sep 07. 2019

사랑스러운 너와 나의 민낯

오늘의 행인1 : 화장한 고등학생들



“은탁이 어때? 도깨비에 나온 이름이긴 한데, 난 이름에 탁자 들어가는 게 좋거든.”

“음...”

“그럼 동식이!! 아, 여자애가 동식이는 너무했나.”

동식이는 완전 남자 같은데. 은주 어때?”


산부인과 정기 검진을 가는 길. 우리는 보통 병원 가는 이 길에, 딸의 이름을 지어보곤 한다. 남편은 무난하고 동글동글한 이름을 선호했고 나는 ‘탁’, ‘창’, ‘추’ 같이 강려크한 발음이 나거나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특이한, 뭐 그런 이름을 선호했다. 너무 흔하고 임팩트 없는 내 이름을 늘 별로라 여겨온 마음이 반영된 거였다.

남편은 보통 내게 양보를 잘하는 편인데, 딸 이름은 도통 양보를 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이름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얼굴로 “별론데.” 했다. 미간까지 찌푸릴 건 뭐람. 어지간히 별론가 보다. 그리고는 되게 평범해서 어딜 가나 있을 법한 이름들을 내놓았다. 이번엔 내 미간이 꿈틀거렸다. 으으 고리타분해.

심각하게 논의를 하며 길을 걷는데, 찌푸린 미간이 꿈틀거리는 미간 옆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소곤소곤 말을 했다.


“방금 지나간 고등학생들 봤어? 다 화장했어.”

“당연하지. 요즘은 초딩도 다 하는데?”

, 그래?"


배 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얘기를 들은 후부터, 그는 부쩍 여자 아이들의 행동이나 유행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아졌다.


"우리 딸은 아서 화장 별로 관심 없지 않을까."

그래도 그 나이에 친구들 다 하는 거 안 하진 않을 걸. 어쨌든 아주 일찍 하지도 않을거야. 집에 화장품이 있어야 말이지.”


그렇겠네... 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우리 집엔 화장품이 별로 없다. (4년 전쯤 선물 받은) 아이브로우 하나와 (비교적 최근에 선물 받은) 립스틱 두 개, (2년 전인가 어쩌다 사보고 안 쓰는) 아이섀도우와 (유일하게 매번 내 돈 주고 사는) 선크림과 파운데이션 하나씩이 내 화장품의 전.

얼마 전 유행했던 탈코르셋 뭐 이런 얘기가 아니라, 나는 언젠가부터 민낯을 좋아다. 특히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더욱 그렇다. 화장 안 한 얼굴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예의상 챙겨 왔던 친절한 척, 착한 척, 예쁜 척, 똑똑한 척 등등 가면이라는 가면은 다 벗는 걸 말한다.


그러니까 그냥 가장 자연스러운 나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 가장 자연스러운 민낯을 한 너와 내가 만나고 사랑하기 바라는 마음.


짚신 짝이 있어서, 는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는 그를 만났다. 언젠가 그에게, 어쩌다가 날 좋아하기 시작했냐는 유치한 질문을 했는데 그때 그가 한 대답이 아주 마음에 다.


“다 같이 밥 먹고 나왔는데, 니가 트림을 되게 시원하게 꺽 하는 거야. 그때 좀 눈길이 갔던 거 같아.”


와. 나의 트림 소리가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난, 적어도 이 자 앞에서 트림하고 싶은데 참아야 하는 일은 없겠다 싶었다. 우리는 7년인가를 연애하고 결국 결혼을 했는데, 누군가 어떻게 결혼을 결심했냐고 물으면,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트림 얘기를 들려줄 것이다.

‘자연스럽고싶어죽겠다병’에 걸린 나, 가 왜 평소에 입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지, 왜 평소 연락도 안 하던 친구 척을 불러다가 어울리지 않는 미소로 안면 근육을 낭비하며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어색한 보폭으로 버진로드를 통과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지 못해 결혼식 올리지 않고 싶다고 했다. 내 병을 사랑해준 남자는 알겠다고 동의해줬고, 직계 가족만 '자연스럽게' 만나고 혼인신고를 하는 걸로 우리만의 결혼식을 마쳤다. 그런데.


“아니 근데 은탁이 진짜 별로야? 왜 별로야?”

“발음이 너무 어려운 거 같아. 은탁. 은탁아. 좀 어렵지 않아? 넌 왜 그렇게 튀는 이름이 좋은데?”

“음... 특이해 보이잖아. 평범한 거 싫단 말이야.”

“사람이 안 특이할 수도 있지. 우리 딸은 안 특이하고 평범해도 사랑스러울 거야.”


세상에.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의 민낯에 '특이한 이름'이라는 가면을 씌우고 있었다.


왜 특이해야 세상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아니 애초에 왜 세상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 걸까, 존재 자체로 사랑스러울 아이인데. 자연스러운 게 좋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사실 세상의 시선을 의식한 채 적당히 꾸며댄 나를 내놓고 있었던 건가.

진짜 민낯을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니라, 고리타분하고 진득한 남편이었나보다.



화장을 예쁘게 하고 예쁘게 웃으며 횡단보도를 건넜던 학생들을 돌아다. 여전히 천진하게 깔깔대며 등교를 한다. 이름표는 보 못했지만, 어떤 이름을 가졌든 사랑스러울 것이다. 우리 아이도 나중에 저렇게 등교하는 날이 오겠지. 친구들처럼 화장하고 싶다고 하면, 화장품을 좀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화장을 좋아하든 민낯을 좋아하든 상관없다. 그냥, 화장하는 이유가 ‘민낯이 사랑스럽지 않기 때문’만 아니면 좋겠다.






<101개의 얼굴에 대한 보고서>

매일 옷깃 스쳐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기록입니다.

낯선 얼굴들이 건네는 안 낯선 이야기.



이전 10화 걱정을 주고받을 네가 있다는, 행복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