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술탄 Oct 17. 2019

서른넷 먹고 중딩들 쭈쭈바 심부름을 했다

오늘의 행인1 : 아이스크림 좀 사다 달라던 중학생


출근하면 제일 부러운 존재는, 하는 일이 뭔지 모르겠는데 책상만 지키고 앉아서 나보다 월급은 배로 받는 상사도 아니었고, 원고 털고 잔다는 동료 작가도 아니었다. 내가 제일 시기질투했던 자들은, 한낮에 여유롭게 카페에 앉아 함께 나온 개를 쓰다듬는 사람들.

대체 무슨 복을 타고나서 저런 여유를 즐기는 걸까. 점심 먹고 늘어난 위장을 끌어안은 채 만근은 될 것 같은 다리를 겨우 끌며 회사로 향하고 있을 때 이런 장면을 보면, 나도 저기 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개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랄까. 그럴 땐 또 날씨도 되게 좋다. 짜증 나게.

 
그래서 나는 요즘 한낮에 하늘이 가장 깨끗한 시간을 골라 동네 한 바퀴를 걷는다. 남들 일할 때 노는 즐거움이란! 발길 재촉할 리가 없으니 느릿느릿 걷는다. 좀만 더 느렸다간 개미랑 보폭도 맞출 지경이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감탄하며 꿈에 그리던 한량 생활을 즐기고 있는데, 다급한 소리가 귀에 꽂혔다.

“저기요 저기요!!”

누구야 이 여유를 깨는게! 살짝 불쾌한 마음으로 소리나는 데를 보니, 학교 울타리 안이다. 중학생 하나가 아주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저기 진짜 죄송한데요...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어서 그러는데 여기 옆에 슈퍼에서 아이스크림 좀 사다 주시면 안 돼요? 여기 바로 옆에 있거든요?”

눈알을 굴려 상황 파악을 했다. 운동장에선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고, 말을 건 학생 뒤로 둘이 더 서서 꿈뻑꿈뻑 나를 보고 있었다. 체육 시간에 뛰어다니다 보니 시원한 아이스크림 생각이 간절한데 나오려면 외출증 같은 걸 끊어야겠지. 아이스크림 사러 외출한다고 하면 선생님이 허락할 리 없으니 이런 방법을 생각한 걸 거고.

아무튼 그러니까 나한테 지금 아이스크림 심부름시키겠다는 거지?? 이것들이.


... 학교에서 못 나오나요?”
“네에...”

아이는 공손한 얼굴을 하고 불쌍한 목소리 대답하고는 돈부터 내밀었다. 나 아직 심부름해 준다고 안 했는데? 들고 튀면 어쩌려고 돈부터 냅다 내줘? 얘들 봐라.

근데 나도 모르게 주는 돈을 받아들고 있는 건 뭘까.

 
“무슨 아이스크림 사다 요?”
“젤루좋아 하나랑...”
“야! 나도 젤루좋아!”
“아, 두 개랑 빠삐코 세 개요.”


말하면서 종종 뒤를 살피는 게, 선생님한테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듯했다. 급하게 아이스크림 이름을 외치는 녀석들에게 잠시만 기다리라 하고, 학교 울타리 바로 옆에 있는 슈퍼로 갔다. 젤루좋아 두 개랑 빠삐코 세 개. 엄마 심부름하듯이 안 까먹으려고 내용을 한 번 더 되뇌었다.


슈퍼 앞엔 롯데 마크가 그려진 커다란 냉동고가 두 개나 있었다. 몸을 숙여 그 속을 뒤지는데, 젤루좋아를 못 찾겠다. 처음 들어보는 아이스크림이었다. 포장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니 이 수많은 아이스크림 사이에서 찾는 게 더 어려웠다.

할 수 없이 가게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아 그거 쭈쭈반데, 라며 탱크보이와 폴라포를 걷어내고 영롱한 오렌지색의 (젤루'좋아'가 아니고) ‘젤루조아'를 다.
지도 모르는 제품을 찾는 나를 보고, 그 사정 알겠 듯 빙긋 웃었다.

“왜, 또 애들이 심부름시키던가요?”


세상에!! 나만 당한 게 아니었어!!!


자주 시키나요?”
“아, 그런다니까요. 지나가는 아저씨고 아줌마고 다 시켜. 요즘 애들 아주 변죽도 좋다니까.”
“그러게요. 지나가는데 하도 급하게 불러서 왜 그러나 했더니 이거 좀 사다 달라 그래서요.”
“으하하. 급하게 불렀어요? 뭐라고 부르던가요?”
“저기요 저기요!!! 하던데요.”
“으하하하. 하여튼 변죽 좋아.”

어른한테 심부름시켜 먹는 어린놈들의 변죽이, 아저씨는 아무래도 너무 귀엽고 웃긴 모양이었다.


사실 나도 어린 녀석들의 심부름을 하는 게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좀 기뻤다. 왠지 마음 넉넉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착각이어도 아무튼 기뻤다. 게다가 선생님한테 혼날까 봐 저 낮은 울타리도 못 뛰어넘고, 사람 하나 지나가기만을 목 빼고 기다렸 녀석들을 생각하니 이 심부름이 반갑기까지 했다.

아이스크림 봉지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내가 나타나자 울타리 너머 벤치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그새 다섯이 됐다. 아이스크림 먹기로 한 놈들이 전부 합류했나 보다.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변죽 좋은 녀석은 허리까지 굽혀가며 인사를 했고, 난 되게 어른처럼 맛있게 먹어요, 하고 가던 길을 다시 걸었다. 가다가 슬쩍 돌아보니 다섯 놈은 그새 쭈쭈바 하나씩을 입에 물고 벙글벙글 웃고 있었다. 여전히 선생님 눈치는 보이는지 나무 뒤에 숨어서 먹다. 이 기억으로 나중에 저들도 어린 친구 심부름 한 번쯤 기쁘게 해 주.

일을 쉬고 한낮에 할 일 없이 돌아다니니 이런 경험도 다 해 본다. 한량의 신분으로 내가 한, 제일 뿌듯한 일이다.






<101개의 얼굴에 대한 보고서>

매일 옷깃 스쳐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기록입니다.

낯선 얼굴들이 건네는 안 낯선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