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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탄 Sep 10. 2019

죄송하지만 궁댕이 좀 치워주시겠어요?

다섯 번째 얼굴 : 삼색 고양이와 개미와 비둘기



더위가 가시니 동네 산책로에 사람이 늘었다. 나도 간만에 좀 먼 거리를 걸으며 여름의 축축한 공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게 한 건, 자고 있 삼색 고양이. 지나가는 사람들 앉아 쉬라고 만들어놓은 화단 돌담에, 되게 당당하게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사실 익숙한 장면이다. 전에도 몇번이나 같은 자리에 같은 포즈로, 그러니까 지금처럼 되게 당당하게 누워서 자는 걸 본 적이 있다. 고양이 앞에는 즉석밥 용기였을 것으로 보이는 그릇 두 개가 놓여있다. 하나엔 사료, 하나엔 물이 담겨있는데, 사료가 바닥나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늘 배부르게 먹고도 남 만큼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겠지. 팔자 좋은 놈.


“야. 고양이!”


슬쩍 불러보지만, 꿈쩍도 안 하고 잔다. 몇번 더 불러봐도 돌아보기는커녕 꼬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꿈쩍도 안 하니 순간 ‘설마...!’ 지만, 규칙적으로 불렀다 들어갔다 하는 힘찬 복부가 의 건재함을 적극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고양이 : "자는데 왜 자꾸 부르고 난리야."



작은 생명이 편히 쉬는 꼴을 보고 있으면 왠지 행복해진다. 더 지켜보고 싶어서 나도 고양이 옆에, 그러나 방해되지 않도록 조금 멀찍이 앉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녀석 꼬리가 좀 잘렸다. 원래 길고양이들은 꼬리가 성한 놈이 잘 없다. 임신했을 때 어미가 영양을 제대로 섭취하지 않으면 꼬리가 기형으로 태어난다는 말이 있던데 확실한지는 모르겠다. 그게 아니더라도 길 위에서 생활하다 보면 꼬리 다치는 일은 허다하지 않을까, 짐작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자고 있는 녀석의 등이 조금 지쳐 보이기도 해서 짠해지려 하는데, 그때 개미 한 마리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뭐가 그리 급한지 조그만 몸으로 빠르게도 걷다가, 앗, 내 궁이 앞에서 막혀 더이상 길을 가지 못한다. 개미는 냄새로 길을 찾는다더니 내 궁댕이가 그들끼리 약속해놓은 길을 깔고 앉았나 보다. 허둥지둥 당황하는 모습에 좀 미안해져서 무거운 궁이를 들어 길을 터주었다.

잠시 갈팡질팡하 개미는 기특하게도 제 갈 길을 찾아서 걸어갔다. 뒤따라 동료가 또 찾아올지도 모르니, 개미 길을 방해하지 않도록 몸을 조금 당겨서 궁이가 반만 걸쳐지도록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그마저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이번엔 비둘기였다. 비둘기 한 놈이 걸어와서, 그렇다, 날지도 않고 걸어와서 내가 앉은 자리 옆에 당당하게 섰다. 어쩌라고. 또 비키라는 건가. 아니 얘들은 왜 멀쩡한 길 놔두고 다들 돌담 위로 걸어 다니는 거야. 안 일어나고 버텼더니, 지도 안 가고 버틴다. 하는 수 없이 또 방해되는 궁이를 일으켜 세웠다.


“넌 날아가면 되잖아. 무거워서 못 나냐?”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비둘기의 뒤통수에 알아듣지도 못할 비아냥을 날려주면서도, 저 작은 것들이 당당하게 내 이를 일으켜 세우는 이 상황이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어디 가서도 그렇게 당당해라. 짓밟히지 말고 당당해라.


이 야단에도 꿈쩍 않고 여전히 자고 있는 삼색 고양이를 한 번 돌아본 뒤, 나는 방금 개미와 비둘기가 차례로 걸어간 방향을 따라 걸었다. 커다란 사람들 틈에서, 저 놈들의 낮잠과 산책이 언제나 무사하 바라본다.






<101개의 얼굴에 대한 보고서>

매일 옷깃 스쳐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기록입니다.

낯선 얼굴들이 건네는 안 낯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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