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제 직업이 교사이다 보니, 가끔 주위의 한국 부모님들이 자녀들의 학교를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문의하실 때가 있습니다. 보통 다른 학부모들에게서 전해 들은 학교의 명성이나 랭킹, 학교 시설과 주변 환경, 그리고 명문대학 진학률 등을 주로 생각하며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좀 안타깝게도 특정 인종이나 민족 출신이 학교에 많으면 성적 경쟁이 더 치열해지지는 않는지, 아니면 반대로 그들이 면학분위기를 해치지는 않는지, 인종과 문화차별적인 질문을 대놓고 하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습니다.
물론 위에 열거한 것들은 자녀들의 학교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고려사항들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한국 부모님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들 중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녀들이 정신적으로 (또는 육체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서 정상적인 학교 생활이 힘들 경우, 학교 차원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시스템이 얼마나 잘 갖추어져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년 전인 2018년 이맘때 있었던 일입니다.
12학년 루카스(가명)는 우리 학교에서 가장 빛나는 스타 중 한 명입니다. 풋볼(Football)로 아주 유명한 우리 학교에서 주전 러닝백을 담당하고 있고, 농구팀 주전 가드 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바쁜 운동부 생활을 하면서 공부도 잘해서 평균 점수가 90%를 넘기도 하는 등 팔방미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친구들과 함께 봉사단체를 만들어서,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홈리스들이 많이 모여 사는 밴쿠버의 다운타운 이스트 사이드로 가서, 홈리스들에게 직접 구운 머핀과 커피를 나눠주며 그들과 친밀한 대화도 나누는 봉사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외부로 알려져 밴쿠버의 지역 신문과 방송에도 소개가 된 아주 멋진 녀석입니다.
그런데 이런 루카스가 좀 이상해졌습니다. 지난겨울부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수업에도 종종 빠지기도 하고, 대학 진학을 앞둔 12학년 녀석이 시험도 거르기 시작하면서 성적이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부모의 동의를 얻어 학교의 Wellness Centre의 디렉터와 교장, 교감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학교의 적극적인 개입이 이루어집니다. 학생의 개인정보 보호차원에서 정확히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전문 상담교사와 교장, 교감만이 알고 있으며, 학과목 교사들에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공유하며 협조를 부탁하게 됩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오는 상담 교사의 이메일에 따르면 루카스는 지금 가정에서, 그리고 본인 개인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으며, 급기야 의사와 전문가들로부터 도움을 받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이 녀석을 위해서 상담교사 한 명과 EA(Education Assistant) 두 명으로 팀을 구성해서 돕기로 했고 교과목 교사들에게도 여러 가지 협조를 당부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녀석은 이제 수업에 오지 않더라도 노트를 비롯한 모든 수업 자료를 EA를 통해 전달받을 수 있고, 스트레스를 가중시킬 수 있는 모든 테스트로부터 당분간 면제가 되며, 그래도 꼭 필요한 시험의 경우엔 따로 마련된 조용한 방에서 치를 수 있게 됩니다. 의사의 소견이 있으면 추가 시간을 받거나 노트를 지참할 수도 있습니다. 지도 교사인 저도 방과 후에 하는 개인 지도 시간을 이 녀석을 위해 먼저 할애하는 배려를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가 보통 일 년에 3-5 명 정도 되는데, 다행히 대부분 잘 회복돼서 학년을 무사히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다행이다 싶고 또 교사로서 보람도 느낍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학교에도 이렇게 어려움에 처한 학생들을 돕는 시스템이 갖추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로부터 4년 남짓 흐른 지난 2022년 여름, 9월 신학기를 앞두고 학교에 새로 채용된 교직원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루카스를 다시 만났습니다. 예전에 가르쳤던 졸업생을 동료로서 다시 만나는 일은 반갑고 좋으면서도, 내가 너무 늙었나 싶은 뭔가 묘한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이제는 멋진 이십 대 청년이 된 루카스는 대학을 마치고, 모교에서 EA로 채용되어 올해부터 풋볼 보조 코치와 EA일을 병행하기로 했답니다. 저를 보고 이제는 같은 동료로서 퍼스트 네임으로 불러야 할지, 아니면 예전 학생일 때처럼 ’미스터 신‘으로 불러야 할지 살짝 당황하는 듯해서 그냥 편하게 퍼스트 네임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루카스가 EA를 한다니… 정말 녀석에게 딱 맞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카스는 분명 모교 후배들의 마음을 잘 알아줄 멋진 선배이자 든든한 코치가 될 것 같아서 학교에서 볼 때마다 아주 흐뭇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