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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ying Pie May 31. 2023

이런 식빵!

캐나다의 가정 폭력

마더스 데이(Mother’s Day)를 이틀 앞둔 지난 5월 12일, 신 선생은 학교 Wellness Centre의 디렉터 제이슨(가명)으로부터 이메일 한통을 받았습니다. XX학년 마이클(가명)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마이클은 조금 왜소한 체격에 매우 조용하고, 공부는 늘 중상위권을 유지하는 매우 전형적인(?) 아시아계 범생이 스타일의 남학생입니다. 좀 소심하고 언제나 살짝 주눅이 들어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녀석입니다.


제이슨이 보낸 이메일에 따르면, 학생 개인 신상에 관한 것이니 아직 자세한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마이클은 현재 가정에서 많은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교사들에게 협조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심리 상태에 따라 학교에 있더라도 수업에 못 들어갈 수도 있으니 미리 양해를 구한다고도 했습니다. 더불어 마이클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가능하다면 앞으로 당분간 시험이나 과제를 연기해 줄 것을 함께 부탁하는 이메일이었습니다. 그날이 마침 단원 평가 시험을 보는 날이었는데, 마이클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방과 후, 교실에서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마이클이 쭈뼛거리며 들어왔습니다.

“미스터 신, 오늘 시험 스킵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제이슨 선생님이 이메일로 너 오늘 상담실에서 머문다고 미리 알려주셨다. 근데 너 괜찮니? “

”네, 뭐 그냥… 아직은 좀 복잡해요. “

”그래, 괜찮아. 무슨 일이지 모르겠지만 잘 해결되길 바란다. 그리고 시험은 나중에 네가 준비 됐을 때 봐도 되니까 걱정 말고. “

”네, 감사합니다. “


그 후로 2주 동안 마이클의 출석은 계속 들쑥날쑥했고 여전히 시험도 보지 못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점심시간, 상심한 표정의 마이클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헤이 마이클, 잘 왔다. 시험 보러 왔니? “

”아, 아뇨, 미스터 신… 그냥 저의 근황을 좀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

”아하하 미안, 농담이었어. 시험은 걱정 말고... 자, 말해봐. “

”자세한 사정은 아직 말씀 못 드리지만 저희 집에 지금 많은 일들이 있어요. 상황이 점점 악화돼서 이제는 RCMP(캐나다 연방 경찰)까지 개입해서 조사를 하고 있는데, 어쩌면 범죄 사건으로 비화할 수도 있게 되어버렸어요. “

(헉, 이게 무슨 소리야… 범죄라니…)

”넌, 괜찮니? “

”모르겠어요. 지금 저는 집에 있지 못하고 혼자 XXX에 있는 청소년 쉼터에 머물고 있어요. “

”아, 많이 힘들겠구나… 그곳에서 밥은 나오지? “

”네…“

”다행이네. 근데 너 도시락은 어떻게 싸 오니? 거기서 도시락도 싸줘? “

”아뇨, 그냥 키친에서 남는 거 아무거나 가져와요. “

”오늘은 뭐 싸왔는데?“

”저… 식빵요…“


하아, 이런 식빵… 이게 무슨 60년대 보릿고개시절 대한민국도 아니고, 2023년 캐나다에서 점심을 못 먹는 학생이 있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그것도 상대적으로 좀 잘 사는 아이들이 다닌다는 사립학교에서 이게 뭔 일이래요. 안 그래도 요즘 갱년기인지 걸핏하면 눈물이 터져서 곤란한 신 선생, 하마터면 애 앞에서 눈물을 보일 뻔했습니다.


이후 지난 주말 내내 마이클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아내와 상의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앞으로 당분간 도시락을 싸다 줄까 생각도 했었는데, 그렇게 하면 녀석이 매일 저에게 와서 도시락을 받아가고 또 통을 돌려주러 와야 하는데, 다른 아이들 시선도 있으니 너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습니다. 학교 카페테리아와 상의해서 쿠폰 같은 걸 구입해서 줄까도 했는데,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염려도 있고 또 주말에는 쓸 수가 없으니 그것도 패스.


이틀간의 궁리 끝에 결국 10번 정도의 식사가 가능한 ’서브웨이‘와 ‘A & W’ 레스토랑 상품권을 이메일로 보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헤이 마이클, 서프라이즈!! 하하! 주말 잘 보내고 있니? 너무 놀라지 말고 잘 받아주면 고맙겠다. 공부는 안 해도 되니까 끼니는 거르지 말고. 나도 너 같은 아들이 둘이나 있는 아빠라서 그래. Hang in there, 마이클! This too shall pass! 그럼 학교에서 보자.“


이틀 뒤인 오늘, 잔뜩 상기된 얼굴의 마이클이 찾아왔습니다.


”미스터 신, 이게 뭐예요!! 저 이거 못 받아요!“

”아, 시끄럽고. 그냥 넣어둬 넣어둬.“

“네… 감사해요.”

“그래, 그래야지. 받아줘서 고맙다. 근데, 네 상황은 좀 나아지고 있니?”

“아뇨….”

그리고 마침내 말문이 터진 마이클은 한참을 때론 담담하게, 때론 울먹이며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의 슬픈 예감처럼 문제는 심각한 ‘가정폭력’이었습니다.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겠네. 그래도 밖에서 헤매지 않고 이렇게 꼬박꼬박 학교에도 나오고, 주변에 도움도 청하고 해줘서 고맙다. 너 보기보다 무척 강한 녀석이구나.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이 또한 지나갈 테니. 암튼 절대 끼니 거르지 말고!”


“네, 감사해요, 미스터신… 사실 지난 주말에 이메일과 상품권 선물을 받고서는 너무 놀라고 고마워서 혼자 한참 울었어요.”


”그래, 그건 비밀로 해줄게. 하하.“


기분이 조금 좋아진 듯한 마이클은 그러고도 한참을 더 떠들다가 다음 수업이 있다며 뛰어갔습니다.



May 31, 2023

혹시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을까봐 짧게 업데이트합니다. 오늘 아침 Wellness Centre 디렉터의 주재로 마이클의 지도 교사들과 교장이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마이클의 현 상황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앞으로 2주도 안 남은 학사일정 마무리에 대한 논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너무나 감사하게도, 앞으로 마이클의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정부의 복지 혜택으로 제대로 커버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책임을 지기로 했습니다. 점심을 포함한 먹는 문제와 교통비는 물론이고 내년 새 학기 등록금도 해결이 되었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Image Source: https://thecommonwealth.org/news/peace-home-initiative-empower-domestic-violence-su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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