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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ying Pie Apr 23. 2023

나를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선생이라는 자리의 무게

10학년때부터 가르쳤던 K가 지난 2018년 졸업을 앞두고,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 한 점을 선물하면서 함께 전해준 카드에는 다음의 문장 하나만 달랑 적혀있었습니다.


“Thanks for never giving up on me…”


이쯤 되면 ‘아, 신 선생 이 아저씨… 이번엔 또 무슨 자랑을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나. 지난번엔 팔랑카(Palanca) 받은 자랑을 하더니… 이거 완전 수학 선생이 아니라 지자랑 선생이네!‘ 하실까 걱정이 됩니다. 하하! 하지만 사실 저도 처음에 이 그림과 카드를 받았을 때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아니 왜 나한테 이런 귀한 선물을 주지? 이 카드는 또 뭐야? 내가 지한테 뭘 해줬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K와 저는 그동안 브런치에 올렸던 다른 일화들처럼 뭔가 기억에 남을만한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서로 죽이 잘 맞아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었고요.


K는 저한테 10학년 때 한번, 그리고 12학년 때 다시 한번, 총 2년 동안 배웠습니다. 10학년때는 비록 공부습관이 잘 잡혀있지 않아서 성적은 바닥권이었지만, 비슷한 성적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상당히 스마트한 녀석이었고,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잔소리를 좀 많이 했다는 것 정도가 기억이 납니다. 부모의 허락을 받고 방과 후에 남게 해서 공부를 시켜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았습니다.


K는 랩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녀석이었습니다. 언젠가 수업시간에 흥이 나서 드레이크(Drake)의 졸린 듯 옹알거리는 랩을, 드레이크 특유의 오줌 마려운 듯 엉거주춤 배배 꼬인 동작을 해가며 아주 비슷하게 커버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해서 말릴 생각도 못하고 그냥 잠시 넋 놓고 구경했던 기억이 납니다.


미술과 디자인에 재능이 있는 K는 진로를 미대 쪽으로 정했고, 그래서 12학년때는 조금 쉬운 수학과목을 선택했는데, 그 반에서는 가장 잘하는 아이들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 해에 특별히 기억나는 K와의 에피소드는 없습니다.


K는 겉모습만 보고는 어떤 백그라운드를 가졌는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외모를 가졌습니다. 나중에 동료 선생으로부터 K가 어린 시절에는 남들과 다르게 생긴 외모 때문에 차별과 따돌림을 받고 힘들어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지만, 제가 가르치던 10-12 학년 시절에는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가 다입니다. 네, 저는 K를 잘 모릅니다. 녀석의 가정환경도, 어린 시절도 모릅니다. 녀석이 고등학교 다닐 때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어떤 고민들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K를 어떻게 대했길래 녀석이 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소중한 그림과 직접 만든 카드를 선물로 주게 되었는지도 전혀 모릅니다. 그게 무척 궁금했지만 K에게 차마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K는 아마 자존감이 매우 낮았던 녀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K처럼 성적은 낮아도 가능성이 보이는 똘똘한 녀석들은 신 선생으로부터 잔소리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런 녀석들에게 잔소리를 할 때마다 신 선생은 그냥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도 많이 해서 이젠 그냥 조건반사처럼 뇌를 거치지 않고 녹음기 마냥 나오는 말입니다.


“너는 내가 볼 때 절대로 능력이 부족한 녀석이 아니야. 가능성이 차고 넘치거든. 그러니 조금만 기운 내서 해봐. 다른 사람들 말은 듣지 마, 그 사람들이 뭘 안다고! 이쪽에선 내가 최고 전문가잖아. 맞지? 그런 전문가님이 보시기에 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넌 할 수 있어!”


네, 학생 개인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깊은 통찰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고, 마치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분들이 고객을 상대할 때 의례히 그러듯 그냥 입에 발린 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K는 어쩌면 저의 이런 입에 발린 잔소리(?)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사실 부모를 포함해서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있는 흔한 말이지만, 자기랑 많이 친하지도 않은 선생이 객관적인 사실인 듯 내뱉는 말에 오히려 더 힘을 얻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치 큰 병에 걸려서 걱정근심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가족 친구들이 옆에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해줘도 아무 소용이 없다가, 마침내 담당 의사가 차트를 보며 무뚝뚝하게 “이 정도는 간단한 수술만 받으면 얼마든지 완치될 수 있습니다.”라고 한마디 해주면 그간의 마음고생이 눈 녹듯 다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선생이라 불리는 자, 그 자리의 무게를 견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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