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싫어지는 계절이다.
새벽 6시, 알람이 울리면 이불 밖은 한기로 가득하다. 숨을 들이마시면 코끝이 시리고, 내쉬는 숨에는 하얀 기운이 서린다. 방안인데도 입김이 서리는 느낌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다.
보일러 온도를 높이면 되지 않나 싶지만, 난방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혼자 자취하던 시절이 지금보다 벌이도 없건만 오히려 그때는 불지옥을 만들곤 했다.
한 겨울 집안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이 젊음의 열기라기보다는 난방비를 아까워하지 않던 젊음의 무지였다는 걸 이제야 안다.
극단적으로 생활비를 아끼던 잠시의 휴직 생활이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휴직 기간 중에 월급이 나오지 않으니, 난방비는 물론 교통비도 아꼈고, 외식보다는 집에서 해 먹는 일이 많아졌다.
2년 전, 학교에 휴직계를 냈다. 이유 없는 무급휴직이었다. 스무 살부터 돈을 벌지 않았던 해가 없었다. 몸이 지쳐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내 인생에 쉼표 한 개 정도는 찍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전세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1년 간 한국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비행기 티켓, 숙소비 등등 나갈 돈은 많았고, 아껴야 할 이유가 하나 둘 늘어갔다.
그저 쉬고자 했을 뿐인데, 과정은 생각보다 번거로웠다. 아내는 준비할 것들로 걱정이 많았고, 나는 무사태평했다. 그 온도 차이는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쉽게 좁혀지진 않았다.
준비해야 하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정작 내가 가장 집중했던 것은 먹을 것이었다. 수입이 없는 1년의 '없는 해외살이'에도 먹을 것은 풍족하게 먹고 싶었다. 그러려면 해 먹어야 했다.
3월 4일 하노이로 떠나는 비행기를 앞두고, 30인치 캐리어에 가득 쌓인 짐들을 최종 점검하고 있었다.
1년 동안 한국에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아시아-유럽-북미-아시아를 도는 일정을 계획했다. 각종 생필품과 옷가지 외에 간장, 된장, 고추장, 새우젓, 멸치 액젓, 매실청, 비빔장, 참기름, 고춧가루가 캐리어에 담기기 시작했다. 위탁수화물 한계 무게 32kg을 넘기지 않기 위해 고춧가루를 1kg 밖에 담지 못함이 한스러웠다. 음식을 해 먹기 위해 필요한 기본 재료가 생각보다 많았고 무거웠다. 재료들은 대부분 김치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태어나서 김장 체험을 3번 해봤다.
첫 번째는 대학 시절 봉사활동을 했던 장애인 복지 시설에서였다. 김장을 했다기보다 수북이 쌓인 절인 배추를 계속 나르기만 했다. 한쪽에서 절인 배추에 양념을 무쳐 김치를 만들고 있었지만, 그 공간은 김장 숙련자들의 공간이었다. 절인 배추를 나르고, 완성된 김치를 다시 통에 담고, 그 통을 나르는 육체노동만이 있었다. 그 고됨에 활동을 마치고 2-3일 앓았던 기억만 어렴풋하다.
두 번째는 스카우트 담당 교사일 때였다. 매달 새로운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도 지쳐가는 학기말이었다. 외부 업체 프로그램 중 ‘김장 체험’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강사는 절임 배추와 김치양념소를 미리 만들어왔고, 아이들은 김치양념소를 절임 배추 사이사이에 바르기만 했다. 단순한 활동이었지만 아이들은 의외로 무척 즐거워했고, 각자 만든 김치를 집으로 가져갔다. 김치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며 환하게 웃던 아이들의 얼굴이 또렷하다.
마지막은 결혼 후 처가에서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처가는 매년 백 포기가 넘는 김장을 했었다. 가장 손이 많이 가는 배추를 절이는 과정은 이미 끝나있었고, 내가 내려갔을 때는 김치양념소를 만드는 날이었다.
사람도 들어갈 만한 커다란 주황색 대야에 배 등을 갈아 넣은 물과 고춧가루가 먼저 들어갔다. 다진 마늘과 생강이 뒤를 이었고, 그 위로 온갖 액젓이 부어졌다. 말통에 담긴 액젓은 그때 처음 봤다. 김장을 도우러 오신 동네 어르신들은 새우젓, 갈치속젓, 멸치액젓을 계량도 없이 정말 느낌대로 쏟아부으셨다. 해마다 김치 맛이 조금씩 달라지는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채 썬 무와 대파, 쪽파가 대야에 들어가 버무려지면 김치양념소가 완성됐다. 그제야 나에게도 할 일이 주어졌다. 자리를 잡고 앉아 절인 배춧잎 한 장 한 장에 김치양념을 발라주었다. 한창을 바르다 보면 삶은 돼지고기 수육이 상에 올랐다. 갓 버무린 겉절이에 고기 한 점을 곁들이면 그날의 피로가 아주 조금은 옅어졌다.
그 기억이 좋아서였을까. 나는 해외에서도 김치를 담기로 마음먹었다. 온갖 양념 재료 외에도 다이소 2,000원짜리 계량컵과 3,000원짜리 야채다지기까지 캐리어에 넣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든든했다. 새우젓은 샐까 걱정되어 한 번 밀봉한 뒤 봉지에 넣고, 다시 지퍼백에 넣고, 그 지퍼백을 조금 더 큰 지퍼백에 한 번 더 넣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가져가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초보 김장러는 모름지기 레시피에 집착하기 마련이었다.
아직도 베트남 하노이에서 처음 만들었던 김치가 생각난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마트로 향했다. 배추, 양파, 사과, 마늘, 생강, 배추를 바구니에 담았다.
배추는 소금에 절였다. 배추가 숨이 죽는 동안 양파랑 사과는 조각으로 썰고, 마늘과 생강은 까서 다졌다. 밥풀 1숟가락을 으깨서 준비했고, 그 모든 재료를 다이소 야채 다지기에 넣고 줄을 당겨서 갈았다. 액젓, 매실청, 새우젓, 고춧가루를 차례로 계량해서 넣으면 김치양념소가 만들어졌다. 절여져 힘을 잃은 배추에 양념을 바르고 통에 담아두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매달 나라와 숙소가 바뀌었고, 이 과정은 매달 반복되었다. 생강은 구하기 어려워 빠지는 날이 많았고, 여행이 길어질수록 준비한 재료들이 떨어져 갔다. 액젓은 피시소스로, 고춧가루는 파프리카 가루로, 매실청은 설탕으로 대체되었다. 배추를 구하기 어려운 나라에서는 엔다이브로 김치를 만들기도 했다. 어느새 온갖 김치는 다 만들어본 셈이었다.
김치를 만드는 수고가 끝나면 돼지고기를 삶거나 구웠다. 고추장과 된장, 매실청, 다진 마늘, 참기름을 섞어 간단한 쌈장을 만들었다. 이제 하루의 모든 수고를 보상받을 시간이다. 숙소를 이동할 때는 비행기를 타거나 기차를 탔고, 30인치 캐리어 2개와 배낭을 메고 이동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짐을 풀자마자 마트에 가서 장을 봐야 했고, 도착한 날은 기본적인 음식 준비로 시간이 많이 들었다. 냉동고에 넣어두었던 맥주도 차갑게 살얼음이 생길 시간이다. 상추와 비슷하게 생겨서 사온 야채에 갓 지은 쌀밥을 올리고, 삶은 돼지고기 한 점과 얇은 마늘 1조각, 쌈장을 더해 입에 넣었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뭐 지금도 종종 먹는 조합이니 특별한 맛은 아니다. 삶은 고기는 촉촉하고 부드럽다. 비계는 고소했고, 그 위로 달고 짭조름한 쌈장, 마늘의 매운맛이 더해진다. 고기가 느끼하다 느껴질 때쯤 김치를 먹으면 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그 맛이었다.
해외에서는 매달 만들던 김치를 한국에서는 만들 일이 없어졌다. 김치 냉장고에는 처가에서 보내준 김치가 가득하고, 직접 김치를 담글 필요는 더 이상 없다. 하지만 가끔 겉절이가 당길 때가 있다. 갓 버무린 배추의 아삭함과 발효되지 않아 깔끔한 매콤함이 올라오는, 그 시원한 맛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 순간의 김치는 직접 담그지 않으면 맛볼 수가 없다.
김장철이다. 알배추만 있어도 된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갓 삶은 수육 한 점에 막 버무린 겉절이를 얹어 먹고 싶다. 쉼표로 찍혔던 시간들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