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을 싫어한다.
어린 시절을 보낸 도시는 유명한 중국집이 제법 많았다. 최소 50년 이상을 보낸 노포들이며, 혹자는 5개 집을 특별히 골라 ‘1원 4루’라고 부르기도 했다.
모든 메뉴가 맛있었지만 각 집마다 자신 있게 내세우는 메뉴는 달랐다. 짜장면, 볶음밥, 탕수육 중 무엇을 먹고 싶으냐에 따라 발걸음이 달라지곤 했다. 하지만 유독 가지 않게 되는 중국집이 하나 있었다.
우습게도 그 집이 가장 유명했다. 당시 2,500원을 내면 고기짬뽕 한 그릇이 나왔다. 처음 짬뽕을 보면 산처럼 쌓아주는 돼지고기가 인상적이다. 그 뒤 한 숟가락 국물을 떠먹게 되면, 불맛은 물론이고 묵직하고 진한 고기 육수가 적당히 매콤해서 감탄을 금치 못한다. 문제는 내가 짬뽕을 싫어한다는 데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짬뽕을 자발적으로 돈 주고 사 먹은 적이 없었다. 어쩌다 먹는 경우라곤 친구가 사주거나, 메뉴를 통일해서 시키는 맘에 안 드는 상황이 다였다.
그럴 때마다 면이 도통 적응이 안 되었다. 양념이 배어들지 않아 밍밍했고, 밀가루 맛만이 가득한 짬뽕의 면은 언제나 실망스러웠다. 비슷한 이유로 우동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짬뽕도 우동도 면과 국물을 함께 끓이는 음식이 아니다. 면은 따로 삶아 그릇에 담아놓고, 완성된 국물을 그 위로 붓는 구조다. 국물이 핵심인 요리로, 면은 그저 탄수화물을 채워주는 곁들임 재료일 뿐이다.
면 자체의 맛과, 뒤따라오는 국물의 여운을 함께 즐길 줄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양념이 잘 배어든 면을 좋아하는 나에게 짬뽕은 여전히 어려운 음식이었다.
이십몇 년을 그렇게 살아오던 어느 날이었다. 지금과 비슷한 계절이었던 것 같다.
코끝이 시려오고 들이마시는 공기가 폐부를 찌를 듯 차가웠다. 패딩하나 걸치면 괜찮을 것 같은 날씨였지만, 대개 계절이 이동하는 시기에는 잘못된 의상 선택이 있는 날들이 종종 있다.
미처 찬 바람을 대비하지 못한 바람막이는, 해가 지면서 제 역할을 다했다. 8시 즈음이었던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고 도대체 왜 그 시간까지 저녁도 안 먹고 혼자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는지 기억도 나진 않는다.
그저 추운 바람을 맞으며, 코끝에서 연신 흘러내는 콧물을 닦으며, 아파트 인근에서 밥집을 찾아 헤맸던 것만 기억난다.
8시란 시간은 참 애매한 시간이다. 중심구역의 상가에서는 한창 장사가 시작되는 시간이었지만, 주거지 인근 후미진 상권의 식당들은 하나둘 문을 닫는다. 너무 추웠다. 그 가운데 불을 밝히는 유일한 가게에 나는 몸을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고 보니 짬뽕 전문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문 연 가게는 없었고, 바깥의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재미있게도 가게는 짬뽕밥을 주력 메뉴로 팔고 있었다. 메뉴 가장 상단에서 빛나고 있는 메뉴를 호기심이라기보다는 그저 시킬 수밖에 없었다.
단무지로 주린 배를 달래고 있는 와중에 짬뽕밥이 나왔다. 짬뽕이 담긴 그릇과 공기밥이 하나 따로 나왔다.
국물 한 숟갈을 들이켰다. 맛을 떠나 짬뽕의 따뜻한 국물이 추위에 시달린 몸을 녹여주었다. 그 한 숟갈만으로도 짬뽕의 값이 아깝지 않았다.
공기밥을 짬뽕 국물에 말았다. 그리고 떠먹기 시작했다. 맛있었다. 양념이 배어든 밥알이 좋았다. 불향이 느껴졌으며, 매콤하고 얼큰한 국물이 배어든 밥알이 좋았다. 국물이 겉도는 면과 달리 밥알은 국물을 온연히 머금었다. 새삼 짬뽕의 매력이 느껴졌다.
몸이 달아올랐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닦아내기 바빴다. 밥의 단맛을 느낄 새도 없이 정신없이 숟가락을 입에 밀어 넣었고, 국물까지 깔끔히 비워냈던 기억이 난다. 그게 내가 자발적으로 돈을 주고 사 먹은 첫 짬뽕이었다.
지금도 짬뽕을 즐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얼큰하면서 매콤한 국물이 땡기는 시기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결혼을 했고, 냉장고에는 재료가 있고, 웬만한 건 집에서 해 먹는다는 점이다.
냉장고를 열어본다. 양파가 보인다. 음. 더 이상 뭐가 없다. 아! 구석에 숨어있던 양배추를 발견했다.
냉동고를 연다. 음. 이번에는 뭔가 제법 많다. 냉동 새우, 냉동 오징어, 냉동 버섯, 냉동 애호박, 냉동 다진 마늘, 냉동 대파가 보인다. 그래. 원래 2인 가정은 냉동고에 음식을 많이 놔야 한다.
스테인리스 웍을 꺼내 예열한다. 도마를 꺼내 양파를 썬다. 웍이 예열되는 3분의 시간 동안 모든 재료를 정리하는 게 목표다. 갈 길이 멀다. 새우랑 오징어를 썰어야 한다.
'치이익'
예열된 팬에 기름을 두르고 썰어서 얼려놨던 대파 조각들을 던진다. 기름이 많이 튄다. 코팅팬이라면 달궈지기 전에 넣었을 텐데란 생각을 하며 튄 기름들을 닦는다. 인덕션은 닦기 편해서 좋다.
파기름에 고춧가루를 숟가락으로 2스푼 정도 넣고 볶는다. 속으로 20 정도를 센다. 고춧가루는 기름과 만나야 한다. 기름과 만나야 깊은 매운맛이 나온다. 물과 만난다면 향이 사라지고 텁텁해진다. 고추기름은 언제나 옳다. 믿음이 안 생긴다면 따라 해 봐라. 기름 냄새만으로도 맛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다시 불을 올리고, 새우랑 오징어를 넣고 볶는다. 볶는 해물에서 약간의 물이 나온다. 해물의 비린 맛을 날리려면 꽤 센 불이 필요한데 어쩔 수 없다. 토치를 꺼내서 지질까 살짝 고민하지만 지금까지도 충분히 귀찮았다.
넣을 야채가 몇 개 없다. 채 썰어 놓은 양파, 양배추 그리고 냉동해 두었던 애호박과 버섯이 전부다. 그래도 넣어야 한다. 냉동 재료를 볶으려면 센 불이 필요하지만 인덕션은 한계가 있다. 다시 토치 생각이 나지만... 접어둔다.
굴소스 1 티스푼을 넣는다. 간장 다음으로 많이 쓰는 게 굴소스 같다. 잘 안 쓰는 사람도 있지만 볶음밥에도 넣고, 김치찌개에도 넣고, 마파두부에도 넣고 웬만한 볶음 요리에는 다 넣는다. 냉동 다진 마늘도 넣고 같이 볶는다. 냉동 재료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 기름이 좀 튀지만 어쩌겠냐.
물 500ml를 넣고 팔팔 끓인다. 사골육수 코인이 있다면 지금 넣야 이따 간을 볼 때 정확히 볼 수 있다. 새삼 라면 스프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아까의 복잡한 모든 과정을 스프 하나만으로 끝낸다. 아. 진짬뽕이나 사다 놓아야 하나?
짬뽕이 끓고 있는 것을 지켜본다. 설탕 0.5 티스푼을 넣고 휘저어본다. 냄새는 이미 훌륭하다. 모든 요리에는 순서가 있고 내 입맛이 있다. 요리를 처음 할 때는 그것을 몰랐다. 불의 세기를 조절해야 함을 몰라서 태워먹은 적도 많았고, 설탕을 먼저 넣어야 함을 몰라 맛이 얕은 적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간은 소금으로 한다. 소금 1 티스푼 정도를 넣고 휘휘 저어 한 숟가락 먹는다. 음. 좀 싱거운가? 소금을 좀 더 넣는다. 마지막으로 미원이나 연두를 아주 약간 넣는다. 그래. 원래 음식은 조미료 맛이다. 1-2방울이 음식 맛을 변화시키는 것도 재미있다.
아마추어 주부는 그때그때 음식의 레시피를 인터넷에서 검색한다. 새로 재료를 사는 일은 힘들기에 냉장고의 재료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 입맛에 따라 양념을 가감한다. 그래서 사실 모르겠다. 레시피를 만든 사람의 짬뽕맛과 내 짬뽕맛이 비슷한 건지 말이다. 그래도 짬뽕 본연의 이 매콤하고 얼큰한 국물 맛은 비슷하겠지?
일 년에 1-2번, 코가 시린 이 계절이 되면 짬뽕이 생각난다. 예전에는 사 먹었고, 요즘에는 해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