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우울의 상관관계
모래 때문에 혼탁해진 물이 다시 맑아지려면
희망을 말하기에 사람도 관성이 있어서 전에 있는 것들을 잘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 맥락에서 우울은 ‘나’를 이루는 어떤 일부라서, 희망을 말하기에 나 스스로도 머쓱해질 때가 종종 있다. 지나치게 예쁜 말을 내가 쓰는 건 내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도 아니거니와, 계속 힘찰 수 없는 인간이니까.
내 몸에 맞는 희망은 어떤 모양인가. 잠시 생각했다. 나름 고민해 보고 정리 좀 해봤다고 금방 떠오른 관용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다. 수많은 사건과 감정이 스쳐 지나가고, 지나쳐 보낼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하니까. 딛고 일어나야지.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냐.’라는 말이 있다. 비유적인 표현이겠지만 ‘처음이 어렵지, 네 번이 어렵냐.’ 쯤으로 해둬야 현실고증이 반영된 풍자가 아닐까 싶다. 두 번이라서 어려운 것들이 너무 많다. 알기 때문에 더 힘들고, 알아서 더 아프다. 그것이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각인되어있는 처음을 벗어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만 덜 힘들고, 조금 더 기뻤으면 한다. 그게 희망이라면 희망이겠지.
처참한 한 스푼에 날것의 단어 한 스푼, B급 감성 세 스푼 정도가 지금 나에게 맞는 희망이다. 더할 수 있다면 정말로 담대한 인생일 것이다. 지금 그것까지 바라기엔 아직 관성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오늘의 최선이다.
어제를 본다. 이 정도면 어제보다 나아와 오늘이 된 거 아닐까. 합리화를 기쁘게 사용하며 웃는다. 작은 빛조차 오늘을 바라보고 있지 않지만, 그늘의 안락함에서 웃을 수 있으면 그만인 삶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다시를 외친다. 계속 힘이 빠져있을 수도 없는 인간이니까. 참을성이 없는 장점일지도 모르겠다. 심심한 김에 딛고 일어나면 좋지. 나아가면 더 좋고. 이러다 보면 어디에든 도착할 것이다. 그럼 무엇이던 되어있을 것이다. 그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