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요새 물가가 생각하는 것보다 높습니다.
우리 딸에게 처음 용돈을 주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혼자서 분식집에서 컵 떡볶이를 사 먹을 수 있을 때부터, 일주일에 5천 원씩 용돈을 주기 시작했다. 이 용돈은 주로 간식을 사 먹거나, 본인이 사고 싶은 작은 물건을 사는 데 쓰였다. 학교 준비물이나 꼭 필요한 물품은 따로 챙겨줬기 때문에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 더 필요한 경우를 대비해 ‘일을 통해 버는 돈’ 시스템을 마련해 두었다. 예를 들어, 빨래를 널고 개면 1,000원, 청소기를 돌리면 1,000원, 그리고 동생 책을 읽어주면 한 권당 200원. (이건 나도 생각해 보면 조금 짠 것 같긴 하다. 큭큭.) 그 외에도 할아버지, 할머니나 주변 어른들로부터 종종 용돈을 받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용돈이 모자란다고 느끼진 않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사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는 차곡차곡 돈을 모아 직접 사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소비를 조절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힘을 키워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이가 ‘덕질’을 시작했다.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사고 싶다고 했고, 본인이 용돈을 모아 사기도 했으며, 몇 번은 내가 사주기도 했다. 사실 나도 한때 서태지와 아이들, H.O.T, R.ef를 좋아하며 테이프를 사고, CD를 사고, 브로마이드며 사진도 모았던 기억이 있어서, 아이의 마음이 낯설진 않았다. 요즘 아이들은 '포카(포토카드)'라고 부르던데, 예전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하지만 요즘 앨범은 조금 달랐다. 예전처럼 음악이 꽉 찬 CD라기보다는 몇 곡만 들어 있고, 포토카드 몇 장이 전부인데도 가격은 2만 원이 훌쩍 넘는다. 아무래도 그 부분은 쉽게 공감되진 않았다.
이게 바로 세대 차이인가.
아무튼, 덕질이 시작되고 친구들과 함께 번화가에 놀러 나가기 시작하면서 딸은 용돈이 부족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번화가’라고는 했지만 사실 우리 동네가 워낙 조용한 편이라, 버스를 타고 나가야 있는 곳이다. 알라딘 중고서점, 큰 다이소, 올리브영, 마라탕집, 떡볶이집 같은 가게들이 모여 있는, 그야말로 아이들에겐 꿈같은 동네다.
컵 떡볶이를 사 먹던 아이가 이제는 마라탕을 먹으니, 부족할 만도 하다. 그래도 꼭 필요하다고 하면 그때그때 조금씩 더 챙겨주고 있었기 때문에, 용돈 자체를 올릴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히 다가와 간절한 메시지를 빼곡히 담은 편지를 써왔다.
" 어머니 저는 저의 용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친구와 놀 때가 많은데 떡볶이는 4500원이고 마라탕은 7000~9000원까지 갑니다. 가서 만약 앨범을 산다고 하면 20000원 후딱입니다. 집안일을 하는 것도 있지만 그걸로는 조금 모자란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평균 용돈이 50000원이지만 그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론은! 30000~40000원 사이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1학년 : 13000원
2학년 : 19000원
3학년 : 22000원
4학년 : 30000원
5학년 : 40000원
6학년 : 50000원
이것은 2024년 11월 20일 유튜브에 올라온 인생팀 님의 초등학교 평균 용돈입니다. 용돈으로만 따지만 저는 2학년과 똑같은 용돈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과 이 영상이 올라올 때랑 물가가 다르다면? 요새 물가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 높습니다. 친구들과 한 달에 한두 번 다니면서 놀면 끝이 납니다. 이상 용돈을 올리고 싶던 OOO이었습니다.
2025년 3월 27일 목요일 OOO 싸인@#$@)" _ 사인은 왜...? ㅎㅎ
* 편지는 쓰인 그대로 올림
아니, 이렇게 정성스럽게 편지를 썼는데 부모로서 무반응일 수는 없었다. 남편과 상의 끝에, 결국 우리는 결단을 내렸다. 일주일에 5천 원이던 용돈을 한 달 4만 원으로 파격적으로 인상한 것이다.
매달 1일에 4만 원을 주기로 하고, 꼭 필요한 곳에 잘 쓰되 한꺼번에 다 써버리고 나중에 돈 없다고 궁상떨지 않기로 약속했다. 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딸의 ‘경제생활 2막’이 시작됐다.
4월 1일. 약속대로 4만 원을 입금해 주었다.
아이의 용돈은 ‘아이 카드’로 지급하고 있었는데, 어디에서 어떻게 쓰였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아이의 핸드폰과 내 핸드폰에 알림이 오도록 설정해두었다. 덕분에 아이가 돈을 어디에 쓰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고, 아이도 스스로 계획적으로 소비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아이의 첫 소비는 아이스크림 할인점.
이제는 비교적 ‘고급 간식’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예전에 형편이 좀 나아졌을 때 제일 먼저 비싼 초콜릿을 사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 마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4월 1일, 2일, 3일. 신났다.
마구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날, 4월 5일. 친구와 놀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온 아이의 통장은 딱, 500원 남았다.
4만 원 중 3만 9천5백 원을 단 5일 만에!
이쯤 되면 계획 소비는 안녕~ 충동 소비는 반가워요~라는 느낌.
나는 그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곧 실망감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맛있는 것도 좋고, 친구와 노는 것도 좋지만, 고작 5일 만에 다 써버리다니.
내가 기대했던 ‘계획적인 소비 생활’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아이에게 말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화를 내기보단, 스스로 느끼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속에서는 계속 부글부글—.
‘이건 교육이다. 참자. 참자…’
그렇게 나는 마음속에서 혼자 삼십 번쯤 심호흡을 하며, 아이를 불렀다.
그래서 아이를 불러 앉혔다.
"어떤 생각으로 썼어? 계획은 있었어?"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아이는 말이 없었다. 묵묵부답.
나는 마음이 답답했다. 뭐라도 말해주길 바랐는데—
‘엄마, 친구가 갑자기 뭐 사자고 해서...’
‘엄마,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냥...’
이런 변명이라도, 아니 핑계라도 좋았다.
그런데 아이는 조용했다. 미동도 없다.
문득 떠오른 생각.
그래, 우리 아이는 MBTI 대문자 T, 나는 대문자 F.
나는 말할 때 감정이 먼저 앞서는 사람이고,
아이는 감정보다 ‘사실’과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는 아이.
돈을 다 써버렸으니, 할 말이 없었던 거다. 그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게 더 서운했다.
왜 속마음을 말해주지 않을까.
왜 나랑 감정을 공유해 주지 않을까.
그날, 아이보다 내가 더 많이 삐쳤다.
그 침묵 속에서 괜히 나 혼자 ‘대문자 F의 감정 폭풍’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말하는 도중에 점점 섭섭해졌고, 결국 화도 났다.
아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결국 눈물이 났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내 마음을 *‘설명’*하려 했지, 아이 마음을 *‘이해’*하려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엄마는 그냥, 너랑 이야기하고 싶었어."
"엄마는 왜 그렇게 썼는지, 네 마음이 궁금했어."
그렇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왜 다 썼어?'가 아니라,
'어떤 마음이었어?'라고 물었더라면
아이는 조금 더 편안하게 속 이야기를 꺼낼 수 있지 않았을까.
딸과 이야기하고 나면, 꼭 후회가 남는다.
그 순간에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돌아서면 마음 한쪽이 쿡쿡 아프다.
나도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
하루를 끝내고 나란히 누워, 꽁냥꽁냥 속 얘기를 나누는 그런 엄마.
작은 고민도 귀 기울여 듣고, 말하지 않아도 느껴주는 엄마.
그런데 현실은 좀 다르다.
나는 감정이 먼저인 사람이고,
딸은 생각과 판단이 먼저인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을 전하려 한 말이 딸에게는 잔소리처럼 들리고,
딸의 무표정한 반응은 내게 서운함으로 돌아온다.
가끔은, 같은 대문자 T인 아빠와 더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아
괜히 질투 아닌 질투도 난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자꾸 나를 돌아보게 되는 요즘이다.
�T(Thinking) 딸아이와 대화할 때, F(감정형) 엄마가 할 수 있는 대화 팁:
사실 먼저, 감정은 천천히: 먼저 "이런 일이 있었더라" 하고 상황부터 꺼내고, 그다음에 “그때 엄마는 이런 마음이었어”라고 덧붙이면 아이가 덜 부담스러워해요.
판단 대신 호기심:"왜 그랬어?"보다 "어떤 마음이었어?" "그때 무슨 생각 했어?" 같은 말이 T 아이에게 부담 없이 자신의 생각을 꺼낼 수 있게 도와줘요.
‘결론 없는 대화’ 연습: F형 엄마는 감정을 나누고 싶고, T형 아이는 해결을 요구받는 걸로 느낄 수 있어요. “얘기만 듣고 싶었어. 그냥 네 마음이 궁금했어”라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아이가 훨씬 편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