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산다는 것

by 밑줄긋는여자

일정 사이에 점심 때가 되어서 간단히 음식도 먹고 시간도 때울겸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다.

나를 반긴 것은 카운터의 사람이 아니라 키오스크(주문하는 기계)였다. 이미 키오스크 주문을 여러 번 해봤었던 나지만 그날은 선불카드를 이용하는 것이었고 쿠폰적용이며 복잡한 이벤트가 있던 터였다.

주문을 하려고 터치를 하다 멘붕이 와서 하던 주문을 멈추고 카운터로 갔다. 카운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지금은 키오스크 주문시간입니다'


아무도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한 명의 직원이 주문이 들어온 햄버거와 후렌치후라이를 정신없이 트레이에 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키오스크 앞으로 갔다.


내 옆에는 6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분이 주문을 하고 있었는데 어쩔 줄 몰라하셨다.

나 역시 주문을 하다 여러번 홈버튼을 누르고 처음부터 주문을 했다.

내 뒤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답답하다는 듯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결국 내가 주문한 음식은 처음에 시키려는 것과 아주 달라졌다.


그래도 어찌어찌 주문을 마치고 빠르게 나오는 음식을 받았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아까 옆에 서 계시던 남자분이 여전히주문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운터를 한 번 보고 다시 키오스크를 몇 번 터치했다가 매장 입구까지 돌아서가시다가 다시 주문카운터에 가시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결국, 남자분은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매장을 나가셨다.


그 분을 도와드릴까 말까 주저하던 나는 결국...돕지 못했다. 보통 때 같으면 도와주고도 남을 거였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버벅거리고 주문하기 어려워했던 것이 창피했던 것이다. 뒤에 서 있던 고등학생들이 나를 기계주문도 못하는 노땅으로 볼 거라는 시선이 부끄러웠던 거였다. 그래서 주문을 마치고 그런일이 없었던 체 하며 앉아 있었던 거다.


그러나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스러웠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의 모습일 수도 있고,

우리 어머니의 모습일 수도 있고,

미래의 내 모습일 수도 있었다.


그분은 주문을 받아 줄 카운터의 직원의 목소리가 그리웠을 거다.

그도 아니라면 주문을 못한 채 우물쭈물 서 있던 자신에게 "주문 도와드릴까요? 저도 한참이나 버벅댔어요." 라고 말붙여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거다.


그러나 나와 매장에 있던 누구도 그분께 따듯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래, 인정한다.

그날 거기엔

인간은 있되, 인간다움은 없었다.


영화 '엘리시움'에서 주인공 맥스는 로봇생산공장에서 로봇감독관의 지시아래서 일한다. 어느날 일을 하러가던 맥스는 로봇정찰대의 검문에서 농담을 했다는 이유로 보호관찰관에게 가게된다.

심장박동이 빨라졌군. 약 먹겠나?

기계 보호관찰관은 맥스의 해명은 듣지도 않은 채 반사회적 행동 표출의 결과로 보호관찰기간 연장을 명한다.


이런 일들이 머지않은 미래에 오지 않으리라 단언하기 어렵다. 어쩌면 코앞으로 다가온 현실일지도 모른다.

아마존은 2016년 본사건물에 무인점포를 열었고 작년 말 댈러스에서도 개점했다. 사람 대신 수백개의 센서와 카메라가 결제를 돕는다. 올해 50개, 2021년까지 최대 3000개로 늘릴 계획이란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할 수는 없다.

멀지 않은 미래에는 무인점포와 AI가 생활 깊숙이 들어오고 누구나 기계로 주문하고 말하는 게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오겠지. 사람끼리의 대화는 거의 없고 친절한 기계음이 사람의 자리를 메울 것이다.

그때는 되려 인간이 서비스해주는 매장이나 업무들이 최고의 대접을 상징하는 또다른 지표가 될지 모른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흘러나왔던 친절한 기계음 사이로 친숙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운 오늘,

기계 앞에서 인간다움을 찾는 누군가가 있다면 다음번엔 먼저 다가가야겠다고 다짐해본다.


keyword
이전 20화부모가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