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준비할 때의 일이다.
나는 남자친구를 무척 신뢰하고 있었고 내게 너무 잘맞는 사람이었다. 함께 여행다니는 것을 즐겼고 배려심이 많았다. 일테면 강의를 하기 위해 이동이 많은 나는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았는데 그는 가는 길에 먹으라며 유부초밥과 샌드위치를 싸주는 식이었다.
사귀는 내내 그 사람의 애정과 자상함을 느끼며 이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 걸어가도 좋겠노라고 생각했다. 이사람을 누구보다 신뢰하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우리가 모임 친구들에게 결혼발표를 하는 날이었다. 동네 모임에서 친해져 결혼까지 하게 되었기에 누구보다 모임 사람들 역시 축하해주었다.
남자친구는 먼저 돌아가고 나는 몇몇 친구들과 남아 술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중에 친한 동생이 나를 불러세웠다.
"언니, 그 오빠말인데... 아, 아니다."
응? 말을 하려다 마는 동생을 보니 그 뒷말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분명 내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일텐데 왜 말을 하지 않는 걸까. 분명 좋은 얘긴 아니겠구나 하는 촉이 왔고 더욱 안달이 났다.
"무슨 얘긴데 그래? 말해봐."
"□□언니가 그 오빠에 대해 한 말이 있긴한데...그냥 사귀는 사이면 말해줄텐데 결혼한다고 하니까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런데..."
"결혼할 사이니까 더 얘기해줘야하는 거 아냐?"
"아니... □□언니가 그러는데 그 오빠가 약간 폭력성이 있는 거 같대."
응? 폭력성?
처음 듣는, 그것도 진짜라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내 남자친구에게 있다는 거였다. 사귀면서 늘 다정하고 섬세하다고 느꼈던 남자가 폭력성이라니 뭔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와 남자친구를 모두 아는 지인이 내게 근거없는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사귀면서 이 남자를 깊이 이해한다고 생각했고 그의 가족사와 직장과 친구에 대한 이야기도 비밀없이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폭력성이 있는것 같다'는 누군가의 말에 불안해졌고 남자친구가 정말 폭력성이 있으면 어떡하지...하는 고민을 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남자친구를 만나면 그의 행동과 말투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물론 의심의 눈초리로 말이다.
'분노'라는 영화가 있다.
피가 범벅이 된 살인사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용의자의 몽타주와 비슷한 세 명의 남자와 그 남자 주변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닷가 고향에 돌아온 아이코는 아빠의 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는 타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진다. 둘은 결국 동거를 하기에 이르는데 살인 용의자의 몽타주와 비슷하다는 아빠의 말을 듣게 된다. 처음에는 타시로의 과거를 모두 안다며 화를 내지만 아이코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경찰서에 제보전화를 걸고 만다.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때로는 아주 사소한 것이나 누군가의 지나가는 말에도 흔들릴 때가 있다. 그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상대나 상황에 대한 믿음의 부족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부족이 아닐까?
내가 선택한 것이 틀렸으면 어떻게 하지?
내가 사랑한 저 사람이 실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 불안함이
우리가 믿었던 소중한 것을,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고
때로는 관계를 영원히 틀어버리는 결과를 내기도 한다.
물론 내가 선택한 믿음이 늘 맞지는 않을 거다. 때로는 내가 선택한 믿음에 대한 배신에 울기도 하고 인생으로 댓가를 치뤄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도 인생의 과정이다. 남이 아닌 내 인생의 과정말이다.
내가 아닌 남에게 믿음의 잣대를 내어주고 만다면 자신을 믿지 않았음에 분노하거나, 다른 길을 제시한 누군가를 원망하게 될 지도 모른다.
영화 '분노'에서 타시로는 범인이 아니었다. (스포는 죄송하다...하하) 아이코는 감식 결과를 듣고 울부짖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믿어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때문에 말이다.
나?
나는 그 사람과 결혼했다. 지인의 말은 꽤나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며 나를 괴롭혔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남이 보는 그가 아닌 내가 느끼고 함께 한 그를 믿기로 한거다.
그 결과는 이렇다.
세상 귀여운 딸아이와 남편과 셋이서 깨도 볶고 투닥거리며 살고 있다.
가끔은 서로 다투고 토라지지만 남편은 여전히 자상하다. 아이 양육에 지친 내가 끼니를 거를까봐 출근하기 전날 밤에 간단한 요깃거리를 마련해주는 사람이다.
이를 통해 스스로 다짐한 것이 있다.
내가 믿은 어떤 것이 또다시 의심의 벽에 부딪혔을 때 어떤 소리에 귀기울일 것인지 말이다.
물론 그것이 정답이 아닐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