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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Nov 16. 2019

영화평론의 가치에 관한 단상

2019년 11월 16일

2014년 등단과 동시에 폐업 영화평론가로 활동한지 오 년 정도가 되었다. 이것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가 처음 영화평론가로 등단했을 때 나를 뽑아준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요즘 영화평론이 죽어가고 있는데 잘 활동해보라는 우려가 섞인 격려의 말을 남겼다. 이미 나의 영화평론가로서의 운명은 시작과 동시에 사망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1990년대 많았던 영화 전문 잡지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2019년 현재에는 영화 전문 잡지라고는 <씨네 21>이 남아있는 정도이다. 1990년대 이후 영화 시장 자체는 커졌고 여전히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가지는 예술 장르이지만 어느 때보다 영화평론이라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요즘 누가 영화평론이란 것을 읽을까? 문학책은 읽지 않아도 영화는 언제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영화에 대한 애정을 가진 시네필들의 유튜브 방송과 블로그까지 합치면 영화평론이라는 것의 존재 이유가 있을지 싶다.


또한 어떤 작품에 대해 애정어린 상찬과 분노어린 질책을 쏟아낸다고 대규모 자본이 움직이는 시장 중심의 영화 제작의 메커니즘 속에서 어떤 것도 바꿀 수 있지 않으며, 어떤 평론은 대중들의 감성과 괴리되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고작 이슈가 되는 것은 특정 영화평론가들의 네이버 평점과 한 줄평 정도랄까?


영화평론가의 역할보다 오히려 직함 그 자체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TV를 보다보면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대중문화평론가나 영화평론가의 직함으로 방송에 등장하고는 한다. 얼마나 간편한가? 전통적인 문학평론가와는 달리 손쉽게 달리는 직함으로 손색이 없다. 그들은 자신이 느낀 영화에 대해 떠들고 있지만 솔직히 같은 업계에 종사하면서 그들의 제대로 된 글 하나 읽어보지 못했다.


영화 관련 전문 잡지도 없으니 청탁이 없고 모 잡지에 영화평론이 실려도 누가 찾아서 읽을까? 또한 <씨네21>의 경우 자기 회사의 기자들만 돌려도 지면을 채우기 충분할 것이다. 필자는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영화평론가 협회라는 단체가 있는데 거기 소속 평론가들이 일 년에 한 번 평론을 모아 기관지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렇게 영화평론이란 영역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으며 가끔 서점에 나가도 영화평론집은 찾아보기 힘들다. 연기 서적이나 영화이론서는 있지만 영화평론집이나 논쟁적인 영화 관련 서적을 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 관련 어느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로 청탁이란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영화평론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에게 영화평론이란 세상을 읽는 창이며, 내 욕망의 기호이고, 타인의 얼굴이며, 시간의 빛이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쓰는 것도 아니며 남에게 지적 우월함을 과시하는 행위도 아니다. 영화가 주는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 향유의 정신이며 정신의 관습적 감각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애초에 영화보기가 좋아서 영화 관련 글쓰기를 시작했고 이제 그것은 일상이 되었다. 남들이 보지 않은 것 말하지 않은 것들을 쓰려고 한다. 모든 글쓰기의 운명이기도 하다. 영화평론은 집단의 권력과 지식의 과시 욕망과 관계없다. 영화 그 자체를 사랑하고 감각하는 방식을 표현함으로써 관객을 설득하는 공감의 예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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