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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Jul 21. 2021

상실의 역사

2021년 7월 21일

문학은 상실의 역사이다.<모비딕> <주홍글씨>보여주듯 자연과 신앙의 상실에서 시작해 몰락하는 귀족들과 산업 사회의 속물들이 출현하는 디킨스의 세계를 경유한 이후 D.H 로렌스는 정신과 육체의 조화 혹은 사랑이란 이름의 생명력 마저 상실한 현대 문명의 도착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 작가 피츠제럴드는 열정적 사랑의 불가능성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소외된 자아의 상실을, 윌리엄 포크너는 해체된 언어를 통해 자아 상실의 심화를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자연의 상실에서 시작해 인간성의 상실로 진행되는 과정이 문학의 역사라는 점이다.

그런데  같은 자아의 상실 이후 출현하는 베케트의 부조리극은 인상적인데  이유는 앞서의 문학들이 대체로 상실과 실패의 경험이라면, 베케트의 세계는 불가능성의 경험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의 실패란 아직 의식이 대상을 향한 지향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지만, 불가능성이란 의식과 대상 사이의 불일치를 인정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럼 베케트 이후의 문학은 어떠한가?

바로 문학에서 환상성 혹은 마술성의 심화이다. 앞에서 언급한 의식과 대상 사이의 불일치를 메우는 것이 바로 환상의 특질이다. 이제 현실의 이면을 환상으로 채우지 않고 현대인들은 살아갈 수가 없다. 환상은 현대인들의 궁지를 표현하는 징후이다. 무수한 좀비와 가상의 역사에 대한 환호 그리고 영웅들의 출현. 삶의 무의미를 증명하는 기호들이다.

이제 문학은 무엇을 상실했는가에서 어떻게  세계의 무의미를 견뎌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상실의 경험에서 다시  실존의 문제로.  이미 사람들은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것을, 자신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하나의 너트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근대 계몽주의 문학의 오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주체를 설정하고 사유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대중들은 반대로 너무 많이 알고 있는 냉소적 주체들이다.

현대인은 이제 문학에서 앎을 구하지 않는다.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바다에 떠있는 각각의 섬일 뿐이다.  이상 항해술과 나침반 그리고 세계의 축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때로 이것은 먹고사니즘과 개인주의로 표현되지만  밑바탕에는  이상 문학이 삶의 이정표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단지 현대인들은 디스토피아를 견디기 위해 환상을 필요로 한다. 가상의 역사로 돌아가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거나, 지금의 현실을 비트는 괴물의 세계로 나아가거나. 어느 쪽이 되었던 중요한 것은 어디서도 삶의 실재를 찿을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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