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41개월
아이가 태어난 후 우리 부부에게는 새로운 일상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매일 밤 9시경 양가 부모님께 영상통화를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예쁜 손주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을
그 변화를 느낄 새 없이 촘촘하게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일상,
그리고 따뜻한 우유+목욕과 더불어 [잠 연관 루틴]의 마지막 조각이 되어주고 있다.
영상통화를 걸면 "오늘은 어디 다녀왔니? 누구 만났어?" 하며
자신의 하루를 궁금해하시는 할아버지께
"오늘 계곡 갔었어요!" "트니 친구들 만났어요!" 하며 신나게 뽐내는 아이와
"그래, 재미있었니?" 하며 대화를 나누는 나의 부모님을 보는 건
백 번 천 번을 생각해도 감사한 일상이다.
물론 아이는 아이답게 산만하고 자주 돌아다니며
물어오시는 말에 대답도 잘하지 않는다거나
지루한 듯 고개를 숙이고 딴짓을 하고 있기도 한다.
당연한 거다,
41개월 된 남자아이의 집중력과 인내력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런 아이의 모습조차 신통하고 좋으신 나의 부모의 마음,
그리고 그런 아이의 모습에 느린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나의 마음,
그런 나의 마음 따위 알 바 아닌 아이의 마음..
이 모든 단자들이 완벽한 동상이몽의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때도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랬다.
아이는 통화 내내
내 허리며 어깨며 원숭이처럼 올라타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 다녔고
핸드폰 속 손바닥만 한 나의 아빠는 그런 아이에게 이 말도 저 말도 걸어보셨다가
아이의 지루함을 읽으시곤 "그래, 얼른 자야겠다. 잘 자거라." 하신다.
이렇게 전화를 끊고 나면 통화 내내 장전된 화살이
온전히 아이에게 향하게 된다.
"너 왜 그렇게 할머니할아버지랑 통화할 때 제대로 안 해?"
핸드폰이 꺼짐과 동시에 켜진, 나의 [냉랭 모드]에
아이는 깜깜한 방에 불을 켠 듯 두 눈을 천천히 꿈벅이며 나를 살핀다.
"네가 다른 사람 말에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너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
오늘은 태은이가 무례했어.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미안해 엄마! 잘할게! 통화 잘하고 싶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눈물을 쥐어짜 내자
방울눈물이 금세 뚝뚝 아이의 양 볼을 타고 흐른다.
"우애애앵"
가짜울음,
얇아진 검은 자가 보이는 실눈에
크게 벌린 입모양만 봐도 가짜울음이지만.
휴..
가짜로 시작했지만 진짜가 되어가는 울음을 울며
아이는 나에게 매달리듯 안긴다.
나는 어느 순간을 넘어서면 모드가 확 전환되는데
그 [돌변]을 감지할 때마다 아이는 덴 듯 울음을 지른다.
이렇게 되면 아이 마음에는 "화난 엄마" 밖에 남지 않는다.
아이에게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선
화도 [잘] 내야 한다.
"엄마가 화내는 거 아니고 알려주는 거야. 울음 멈추고 서로 조금 떨어져서 생각을 해보자."
엄마는 여기 있을게, 마루에 나가있으라며 아이를 내보내고
널따란 침대에 벌러덩 누워 팔꿈치로 X자를 만들어 두 눈을 가린다.
"여보, 다 됐어. 나와서 먹자아"
늦은 저녁식사를 알리는 남편의 성화에
오래 누워있지도 못하고 나오자
거실 한 바닥에 앉아 혼자서 놀고 있던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고는 벌떡 일어나
"엄마! 미안해애!"
장난스럽게 두 눈을 반짝인다.
'내가 생각보다 금방 나와서 신났구나.'
'그러면서도 내가 정말 화난 건 아닌지 눈치 보고 있네.'
아이의 마음이 전단지보다 명확하게 읽히는 때가 있다.
아이의 사과는 빠르고 진솔하다.
열심으로 연기하듯 한 훈육이 다 무색해지는 기분,
'나는 엄마가 좋아! 엄마랑 이제 놀 수 있는 게 제일 중요해!'
라고 온몸으로 얘기하는 작은 인간.
멍하니 서서 아이를 내려다보던 나는
기대에 차 나를 살피며 올려다보던
그 작은 인간보다 한참이나 작았다.
아이 앞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자
"엄마, 이제 화 안 났어? 엄마 내가 미안해"
"엄마 화 안 났어, 그렇게 얘기해 줘서 고마워"
'헿' 안도하며 내 다리가 만들어낸 삼각형 안으로 쏙 들어와
발뒤꿈치를 바짝 세워 서서 두 팔로 내 목을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당긴다.
"태은아, 태은이는 엄마가 태은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어!"
"얼마나?"
"백개나!"
"(풉) 백개보다 훨씬 더!"
"어.. 백십 개나!!"
"(푸흡) 백십 개보다도 훨씬 더 더!"
"어…백! 십!.. 열개나!!! 엄마! 백십 열 개나 태은이를 사랑하지!"
#백십열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