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게 될 날이 오더라도
2023년 4월, 14개월
고마운 봄비가 내리는 오후,
한낮의 시간인데 밖은 컴컴하다.
이런 날은 기분이 이상하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도 토독토독 크게 들리고.
학생일 때 특히 더 그랬다.
밝아야 할 시간이 이렇게 컴컴하면
뭔가 두근거려서
1 분단 맨 뒷자리에 앉아 턱 괴고
창 밖을 하염없이 보곤 했었다.
한낮의 어두컴컴이란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는 때의 그것과는 다르다.
뭔가 세피아톤의 셀로판지를 통해 보는 느낌,
그리고 이내 누군가 그 필터를 걷어가 버릴 거 같은
묘한 조바심도 인다.
아이는 방에서 맛있게 자고 있다.
하루를 1부와 2부로 나눠주는 인터미션,
아이도 나도 휴식하는 시간.
비가 오는 날이면 아이의 낮잠은 한층 깊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어 녹진한 비냄새를 맡고
소파에 털썩 파묻혀 반쯤 누운 채로
더듬더듬 쿠션을 머리맡에 구겨 넣는다.
가물가물 눈꺼풀이 따땃하다.
오늘같이 이렇게 태은이와 단 둘이 보내게 되는 날이면
그전 날부터 잠 못 이루고 한참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어딜 가지 뭘 할까 찾아보고 고민하곤 한다.
'날이 많이 풀렸으니 야외에서 햇빛도 쬐며 뛰어놀고 싶은데..'
'내일 몇 도지? 나가 놀만 하겠네, 좋아'
'이 공원 좋아 보이는데? 우리 집에서 몇 km 지?'
당장 네비를 찍어보고 30분 안팎이면 별표 저장을 한다.
그렇게 저장된 온갖 공원들을 하나하나 도장 깨기 하는 일상,
세상에 공원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것도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된다.
그러고 보니 단 하루도
아이와 집에'만' 있으며 보낸 하루가 없다.
기어코 기저귀와 여벌옷, 간식 등을 챙겨
매일 밖으로 나가 두어 시간 외출하고
낮잠시간 맞춰 돌아오는 루틴이다.
아이에게 다채로운 경험을 주고 싶은 마음,
도 물론 있지만
사실은 [뭐라도 해야 시간이 잘 가]는 탓이다.
그래야 아이도 낮잠을 달게 잘 테고
나도 비로소 쉴 수 있으니,
꿀 같은 인터미션의 끝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리고
오늘의 2부가 열릴 때를 위해
충전은 필수다.
누군가 [상냥함은 체력에서 나온다]고 했다던데
육아를 하며 그만큼 깊이 공감한 한 마디가 없다.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더 잘 쉬어줘야 한다.
그렇게 찾아온 달가운 휴식시간,
아이가 깨어있을 때 못했던 것들을 실컷 해야 한다!
그리곤 나 역시 여느 엄마들처럼
아이가 잠든 동안 아이의 사진을 본다.
죄책감 없이 핸드폰을 들어 사진첩을 열고
최근 찍은 사진들을 둘러보는데
한갓진 검지를 톡 톡, 화면을 쓸어 올리다가 문득,
'태은이의 뒷모습을 이렇게나 많이 찍었었네-'
새삼.
새삼스러운 기분이 된다.
그러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태은이가
지금의 태은이가 아닌 모습이라면
나는 지금의 태은이를 얼마나 그리워할까-
기어코 태은이는 쑥쑥 성장할 테고
언젠가 거뭇거뭇 수염 나는 날도 오겠지.
내 키를 훌쩍 뛰어넘고
잡은 손도 내 손 보다 더 크고 거칠어지겠지.
그런 날에 가서는
오늘의 이 말캉하고 향긋한 태은이가
얼마나 보고 싶을까- 하는.
그래서 여느 날과 다름없는 오늘 이 하루가
사실은 미래 어느 날의 내가 선물로 받은 특별한 날이라면,
나는 눈뜨기 전부터 설렐지도 모르겠다.
보송보송한 기저귀로 갈아주고
윗도리는 하늘색이니까 바지는 밤색으로 할까?
옹알옹알 예쁜 목소리로 엄마한테 무슨 말하는 거야? 으응 그랬구나아
오늘은 소고기랑 시금치, 양배추랑 버섯을 넣어줘야지! 하며 이유식을 만드는
사소한 일상이 전부 반갑고 재미있을 거 같아,
그런 생각들이
이 평범한 순간순간을
고맙고 귀하게 만들어준다
돌아누운 아이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쫙 펴서 대본다.
겨우 한 뼘 정도되는 태은이의 작고 여린 등이
어느새 나보다 크고 넓어져
나는 그 뒷모습만 보게 될 날들도 오겠지.
정말로 어떤 날은
아이의 뒷모습만 보고 지나가기도 하겠지.
그때 느낄 기분이 너무 쓸쓸하지 않게
어쩌면 지금부터 살살
나도 모르는 새에 연습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