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다해 사랑해
2025년 11월, 46개월
엄마 다섯에 아이 여섯,
열한 명이 야심 차게 떠나온 북한산 생태탐방원으로의 여행.
산속의 밤은 일찍 찾아왔고
까만 숲 속에 위치한 우리들의 숙소 불빛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았다.
평소에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만나는 친구들이라
아이들은 다 같이 내복 입고 왁왁 웃고 떠들며 노느라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다 같이 오길 정말 잘했다,
아까의 기분 그대로 집에 가지 않길 정말 잘했다.
산 속이라 2~3도가량 더 낮은 기온,
갑자기 가을에서 겨울로 온 기분이었다.
아이들은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낮잠도 없이 밤 9시 반까지 놀아제낀 덕에 노곤해져서는
다들 엄마 손을 잡고 하나 둘 자러 들어갔다.
나와 태은이 방은 싱글침대가 2개 놓여 있었는데
한 켠으로 2개의 침대를 밀어 넣어 붙이니
근사한 킹사이즈 침대가 되었다.
"이제 자자."
불을 끄고 누워 가만히 눈을 감았다.
침대 끝 저 만치에서 애착곰인형을 안고있던 태은이가
천천히 몸을 굴려 내 품으로 조심스레 파고들었다.
아까의 사건이 있은 후부터
나와 아이는 잠시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괴로웠던 시간은 잊고 즐거운 시간들에 좀 더 집중하려고
노력했던 거 같다, 나도 태은이도.
그런 왁자지껄한 소란 속에 있다가
둘만 조용히 남겨진 까만 순간이 오니
우리는 각자 생각에 잠겼다.
평소처럼 웃거나 까불지 않고 조용히,
가만히 내 곁으로 파고드는 아이의 움직임에서
조심스러운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내 아이는 언제까지나 천진하고 티 없이 까르르 웃기를 바라지만
이렇게 하나 둘 불편한 공기를 느끼고 그 시간을 견뎌내야 할 일이
앞으로 더 잦아지겠지, 그러면서 세상을 배워가는 거지.. 생각하면서도
까만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우리 둘의 데면데면한 움직임이,
유독 크게 들리던 이불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아팠다.
"태은아. 오늘 많이 속상했어?"
까만 천장을 응시하며 나는 가만히 물었다.
"응 엄마. 나 오늘 너무 속상했어."
"무섭고 싫었어?"
"... 무섭고 싫었어."
아이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물기 잔뜩 머금은 목소리를
간신히 목구멍 밖으로 내뱉었다.
"태은이가 오늘 왜 그렇게까지 혼난 건지는 알지?"
"응, 내가 유하를 물어서. 그거 정말 잘못한 거잖아."
나는 목구멍에 뭔가 콱,
걸린듯한 이물감을 느꼈다.
마른침을 꿀꺽,
뜨겁게 삼켰다.
"그래 맞아 태은아.
그건 정말 큰 잘못이야.
앞으로는 절대로 그러지 않도록 엄마랑 같이 노력하자, 그럴 수 있지?"
"어, 엄마.
이제, 다음부터는 친구 물지 않을게."
"그래, 잘 얘기해 줘서 고마워."
이대로 2~3분만 가만히 있으면 태은이는 잠들 거 같았다.
이 정도로 할까,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
.
.
아니,
나 역시 아이에게 제대로 해야 할 말이 있다.
오늘이 가기 전에,
바로 지금.
"그리고 태은아.
엄마가 아까 너무너무 무섭게 화내서,
엄마도 미안해."
나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이는 왈칵,
삐져나오는 울음을 터뜨렸다.
큰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가만가만,
다음 말을 기다리며 울었다.
"엄마가 그렇게까지 할 건 아니었는데 태은이가 많이 놀라고 무서웠지?
엄마가 아까 태은이가 싫었다고 얘기했는데 그건 정말 잘못한 거야.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됐는데 정말 정말 미안해.
후회할 말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면서도
결국 뱉어버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될 대로 돼라]라는 식의,
상처주고싶어 안달이 나있던 그 순간의 못난 내가 보인다.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거대한 자괴감이
방안 가득 검게 차올라 일렁인다.
"아무리 엄마가 화가 나고 마음이 괴로웠어도
그렇게까지 얘기한 건 엄마 잘못이야.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을게. 엄마가 정말 미안해."
"어, 알겠어. 괜찮아."
우리는 육성을 내지 않고
속삭이면서 얘기했다.
진심이 조심스레 바람을 타고 날아와
서로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엄마가 태은이 세상에서 제일 많이 사랑해.
매일매일 모든 순간 사랑해.
죽을 때까지 사랑해."
"어, 근데.. 엄마. 엄마가 죽으면.. 나는 어떡해?"
태은이는 다시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태은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나도 태은이에게 사랑한다 얘기하며
[죽을 때까지]라는 말을 쓴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의식적으로 피해왔을 그 말을
그 순간에는 의도적으로 꺼낸 거였을까.
[죽음]이 뭔지 알 수 없는 나이라고들 하지만
어느 나이에 이르러서건 죽음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나이에 머무르고 있건 간에 죽음을
모른다고 하겠는가.
오늘 느낀 절망과 두려움에서
[죽음]과 맞닿을 정도의 무언가를
태은이는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괴로움으로 범벅진 오늘의 사건으로 인해
나와 아이는 [영원한 이별]이 전제된 사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실감했을지 모른다.
그러니
매일을,
오늘을,
순간을,
마음 다해 사랑해야한다는 걸
새삼 깨달으라고.
"아니야, 태은아. 그럴 일은 없어.
엄마가 태은이 곁에서 항상, 계속계속 함께 할 거야.
걱정하지 마."
나는 아이를 꼭 안고
무시무시한 감정을 지우고 싶은 마음으로
아이의 따끈한 이마에 여러 번 뽀뽀를 해주었다.
아직도 정수리며 이마며 입이며 달큼한 아기 냄새가 피어오르는 존재,
내 품에서 노곤노곤 느른해진 아이는
말랑한 두 팔로 내 목을 끌어안고
관자놀이에 코를 박고 엄마냄새를 킁킁 맡다가
그제야 쌔액쌕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나는 잠든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한참 동안 까만 천장을 꿈벅꿈벅 쳐다보았다.
#까만밤
#까만방
#엄마나이네살
#다시제자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