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를 좀 먹여야지."
2025년 12월, 서울랜드 내 민속식당
새해부터 영하 10도를 내려가는 날씨가 이어질 거라는 예보에
'그래, 오늘은 낮 최고기온 8도. 가려면 오늘 밖에 없다!'
비장한 마음으로 향한 서울랜드, 눈썰매장.
태은이 보다 열하루 일찍 태어난 친구 연우와 연우의 엄마 경희와 나,
아이 둘에 엄마 둘이 비장하게 주차장에 도착했다.
경희와 나는 각자의 아이들을 데리고 좁은 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혔다.
혹한기 훈련이라도 떠날 채비로 아이들을 꽁꽁 싸매고
중동의 여인처럼 눈만 내놓은 상태로 만들고 나서야
이제 가자! 외치며 입장했다.
근 한 달이 되도록 이어져온 각종 브랜드의 블랙프라이데이 행사 덕분에
반값으로 구매한 스노우맨 수트를 입은 태은이는
빨간 오재미 같이 귀여웠다.
부츠까지 갖춰신고 불편했을 텐데도 군말 없이 총총
눈썰매장이 언제 보이려나.. 걸음이 설렜다.
십여분을 걸어 드디어 눈썰매장이 보인다.
하얀 슬로프가 눈에 들어오자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두근두근,
눈을 보고 흥분한 아이들이 강아지처럼 달려가는 뒤통수에 대고
"아직 아니야! 락커에! 가방 넣고 가야 해!"
두 아들 엄마는 목청껏 소리치며 각자의 강아지들을 챙겼다.
빨간 썰매를 끌고 야트막한 슬로프를 걸어 올라가니
라인 당 2~3팀 정도 대기 중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차례가 오기까지 그 5분 정도를 기다리면서도
몇 번이고 꺅꺅 소리 내어 웃으며 즐거워했다.
유아용 슬로프라 만만히 봤지만
제법 스릴이 넘치는 슬라이딩,
태은이와 연우는 썰매를 실컷 타고는
눈밭에서 한참을 뒹굴며 눈싸움도 하고
양 볼이 발그레해지도록 놀았다.
'역시 오길 잘했다.'
봄에 꽃 보러 다니고
여름에는 계곡물에 몸 담그고
가을 단풍 찾아 여행 다녀와서
이제는 겨울 눈놀이다.
함께 할 육아메이트가 있어
가능했던 시간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엄마들은 엄마들대로
제철 우정을 쌓아간다.
"언니, 배 안 고파?"
"나 배고파! 너무 고파!"
"그치 우리 뭐 먹으러 가자!"
이렇게 푸지게 논 날은 꼭
허기가 날카롭게 빈 속을 찌른다.
그러고 보니 손도 발도 얼굴도 시렵다.
'어디 따뜻한 데 들어가 뜨끈한 걸 마셔야겠어!'
마침 민속집이 바로 앞이라 잰걸음으로 향한다.
태은이 한눈팔 새 없이 손목을 꼭 잡고,
아이는 거의 끌려오다시피 따랐지만
그래, 너도 배가 고플 것이다..
이런 순간에는 메뉴 선정에 신중히,
허기에 눈이 돌아 닥치는 대로 주문하다 보면
가세를 탕진할 수도 있단 걸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설렁탕과 떡볶이, 그리고 감자치즈 전을 주문하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 따뜻한 장판 바닥에 앉았다.
노곤노곤 녹아내리는 느낌이
꼭 봄날의 아지랑이가 얼었던 몸에 피어나는 거 같다.
"아, 이제 좀 살 거 같다."
"이제야 앞이 좀 보이네.."
나 한 숟갈 입에 넣고
씹으면서 아이 숟갈에 쌀밥이며 고기며 전이며 올려준다.
숟갈이 차기가 무섭게 낚아채서 작은 입에 아구와구 욱여넣는 동안
나도 빠르게 한 숟갈 또 먹어야 한다.
넷 다 배가 고파 허겁지겁,
탁구공을 받아쳐내듯 엄마들의 손은 바쁘다.
이 리듬이 익숙해지고
비로소 배가 어느 정도 차
템포가 조금씩 느려질 즈음
우리 밖에 없던 방에 새로운 팀이 들어왔다.
아직 머리카락도 다 나지 않아
얇고 보드라운 머리칼이 조심스러운 딸아이를 안고
아이의 아빠가 넘어질세라 뒤뚱이며 들어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아기띠를 풀었다.
곧이어 기저귀 가방을 든 엄마가 따라 들어와
침낭 같은 아이의 두꺼운 패딩점퍼를 벗겨주며
연신 식당 내를 두리번 댄다.
폭신하고 새하얀 벙거지 모자를 쓰고
길지 않은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땋아내렸다.
"빨리 가서 뭐 좀 사 와!"
"지금? 뭐... 뭐?"
"아 그냥 알아서 보고 좀 알아서 사와."
"으.. 응..."
경희 뒤 편으로 등을 맞대고 앉았던 아빠가
몸 녹일 새도 없이 스프링처럼 튀어올라 일어나
구겨진 신발에 다시 발을 구겨 넣는다.
돌이 조금 안되어 보이는 아기,
아기 엄마는 아기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위태위태하게 서있는 아기를 잡아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목은 완전히 180도 돌려
아직도 신발을 신고 있는 아빠를 보고 있다,
흰자위만으로.
아빠가 신발을 채 제대로 신지 못하고
탁탁 걸으며 발에 끼워 넣는 모습까지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기와 눈을 맞추고
세상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아가, 여기 응 식탁 잡아요. 어어, 위험해. 젓가락은 만지지 않아요."
저렇게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고만 흘끗 대고 떡볶이나 먹어야지 하는데 갑자기
"오빠! 오빠아! 하우 진짜!"
엄마는 성이 잔뜩 난 얼굴로 아빠를 다시 불렀다.
나와 경희는 순간 눈이 마주치며 덩달아 긴장하고
입에 넣으려던 숟가락을 멈칫했다.
"아니, 빨리 달라고! 패드! 가방을 통째로 왜 갖고 나가?"
"아.. 지갑이 여기 있어서.."
"그럼 지갑만 빼서 가져가지,
여기 지금 오빠 간 사이에 뭔 일이 있고 내가 뭐가 필요할 줄 알고
그걸 다 갖고 나가냐고!"
"어, 여기.."
아빠는 지갑만 꺼내서 다시 퇴장하고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뒤적거린다.
아기가 뭐라 뭐라 못마땅한 옹알이를 하며 엄마를 채근한다.
"어어~ 틀어줄게, 틀어줄게. 잠깐마안~ 됐다! 아기상어! 상어상어 나왔네~"
나도 족히 만 번은 들었을 아기상어 노래가 흘러나왔고
아기는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엉덩이를 들썩인다.
엄마는 그런 딸을 세상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아이구 잘한다 아이구 이뻐 연발하며 박수를 쳤다.
그녀가 기분이 좋아보인다.
나와 경희는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엄마 마음도 이해 가고
저 아빠 마음도 뭔지 알 거 같다...'
곧 이어 아기의 아빠가 돌아왔다.
쟁반에 설렁탕이며 전이며 먹을 걸 잔뜩 담아
처음 등장할 때처럼 조심스럽게 이번에는 음식을 내려놓는다.
"와아 아빠 왔다~ 이제 먹자아!"
소리나지 않게 박수를 치며 아기 엄마가 웃어보인다.
부산스럽게 수저를 깔고 먹을 채비를 마친 아빠가 한 술 뜨려는 순간,
"애기 앞접시는?"
싸늘한 한 마디에 반사적으로 끙차 하고 일어나
또 다시 신발을 구겨신는다.
"으응~ 기다려~ 아빠가 앞접시 갖고 오면 줄게요~"
배가 고픈 아기는 또 다시 엄마를 채근했다.
"하여튼 진짜.. 왜 꼭...!"
엄마는 입술에 힘을 단단히 주면서
혼잣말을 흘렸다.
아빠가 재빨리 앞접시를 가져오자
엄마는 설렁탕 국물에 쌀밥을 덜어 정성껏 불며 섞었다.
아기는 패드를 보면서 들썩들썩 잘도 받아 먹는다.
생각보다 음식들이 맛이 좋았는지
금세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테이블 위로 몸을 쑤욱 기울여
아빠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엄마,
입술을 모아 오물거리며 가는 눈으로 웃어 보인다.
그런 그녀를 스윽 보고는 별 말 없이 연신 끄덕이며
"먹어. 먹어."
하는 아빠.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그런 그의 널찍한 등을 보노라니
평화롭게 일단락 된 공기 덕분인지
장판 바닥에서 올라오는 뜨끈함 덕분인지
나는 왠지 졸음이 쏟아졌다.
#배고프면물어요
#상냥함은포만감으로부터
#사소의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