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에 선물을 준다고?
대학생 시절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와 함께 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아직 지하철 역까지는 조금 남았는데 친구는 약속이 있다면서 들를 곳이 있다고 했다. 그리곤 내게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뭐냐고 하니 생일선물이라고 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한 발 물러서며 양 손을 위로 올렸다. 마치 누가 총이나 칼을 들이대기라도 한 마냥. 친구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었는지 왜 그러냐고 했다. 몰라.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말은 못 하고 어색하게 선물을 받아 들고 집으로 왔다. 고맙다고 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선물 받고 나서도 '내가 이 선물을 받아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자주 가던 맥주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정까지 술을 마시다 술집이 문을 닫아 편의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쩌다 생일 이야기가 나왔다. 테이블에 앉은 우리는 서로의 생일을 물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어제였다고 했다. 내가 아니라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 대신 말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랬더니 친구들은 왜 방금까지 같이 술을 마셔놓고 생일인 걸 말 안 했냐고 했다. 나는 생일이 뭐 대단한 거냐, 여기서 이렇게 술 마시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생일이 뭐 별거라고. 오히려 축하를 받으면 기분이 나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생일날 죽으면 어떨까?
일기장을 꺼냈다. 2007년의 나는 "생일날 죽으면 어떨까?"라고 질문하고 있었다. 어머니께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컴퓨터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었던 것 같다. 그래놓곤 "하하!" 웃었다.
상단의 2007이 언제 쓰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컴퓨터 한 시간만 해도 돼요?
우리 집엔 97년도인가 98년도부터 컴퓨터가 있었다. 당시 가격이 200만 원 안팎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볼록한 모니터에 전원을 넣으면 '떵!"과 '펑!" 사이의 소리가 나면서 윈도우 98 로고가 나왔다. 당시에는 기사님들이 오셔서 컴퓨터를 수리한 뒤 게임을 깔아주고 가시기도 했다. 그렇게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유치원이었는지 초등학교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무튼 가방을 내려놓고 나면 컴퓨터 앞으로 달려갔다. 하루에 한 시간.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그 세계가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임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 더 좋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 컴퓨터는 거실에 있었다. 미디어에서도 컴퓨터는 거실에 있어야 하고, 뭘 하는지 가족들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감시와 허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컴퓨터 게임을 하기 전에 "컴퓨터 한 시간만 해도 돼요?"라고 물어봐야 했다. 토씨 하나도 안 틀리고 정확히 저 대사였다. 짧게는 몇 년, 몇십 년을 반복했던 말을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다. 혼날까 봐 그 말을 꺼내기까지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하던 감각도 생생히 기억난다. 목에 무언가 턱 막힌 것 같고, 무섭고, 답답했다.(어른이 되어서도 이 패턴은 반복된다)
그럼에도 당시 나에게 가장 간절했던 건 "컴퓨터 한 시간"이었다. 괜히 방 청소를 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는 등 어머니의 마음에 들만한 일을 했다. 나중에는 내가 공부를 하고 있으면 "컴퓨터 하고 싶어서 그러지?"하고 먼저 물어보시기도 했다. 나는 항상 아니라면서 내 진심을 입증하려 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어느 날은 한 시간만 하라고 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은 같은 행동과 같은 질문을 해도 불같이 화를 내시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오늘은 컴퓨터를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시무룩한 동시에 엄마를 실망시켰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꼈다.
아마 저 날은 화를 내셨던 것 같다. 하필이면 생일이었고.
내 생의 최고의 생일?
생일에 대한 기록이 또 있었다. 생일이 행복한 날이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못했던 것 같다. 처음 봤던 생일에 대한 기록이 2007년이니, 그로부터 1년이 지났음에도 나는 같은 표현을 쓰고 있었다. "내 생의 최고의 생일"이라고. 나는 현실을 전복하는 것으로 나의 좌절을 표현하고 있었다. 상처 받았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방법은 몰랐다.
공부를 해야만 컴퓨터를 할 수 있었다
평범한 하루
2010년이 되면 생일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사라진다. 생일을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했다가 상처를 받는 것보단 평범한 날이라고 여기는 게 낫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생일이 되면 기뻐하고, 축하받는 게 아니라 방어기제를 사용해 아무렇지 않은 날, 평범한 날이라고 말하면서 상처 받지 않을 준비부터 했다. 심지어 성인이 된 이후로는 생일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다. 생일 전 후의 기록은 있는데 생일 당일에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일기장에서 생일이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기대를 안 했을까
나도 생일이면 축하를 받고, 선물도 받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생일은 내가 원했던 모습과 조금 달랐다. 부모님께서는 생일이 내가 태어난 날이 아니라 부모님이 낳아주신 날이라며 부모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미역국이라도 끓여줘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내 생일에 유난스럽게 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의 생일파티에는 선물을 들고 찾아가면서, 내 생일은 검소하고 평범하게 보내려고 했다. 받고 싶은 게 있음에도 아닌 척. 내 안의 진짜 욕구는 억압했다.
만찬에 물음표가 있는 걸 보니 만찬도 아니었나보다
내 감정을 속이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친구들의 생일잔치를 비판했다. 생일잔치는 "괜히 친구들 불러서 부모님이 벌어놓은 돈 다 쓰고 고생"시키는 것이고, "PC방 같은데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걸 "거창"한 것이라고 여겼다. "가족끼리 만찬을 즐기거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진짜" 생일잔치라고 합리화했다. 사실은 나도 여느 가족들처럼 케이크도 받고, 선물도 받고, 친구들을 불러 파티도 하고 싶었으면서.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케이크는 느끼해서 싫다고 하고, 친구들하고 노는 것보다 가족과 있는 게 좋다고 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
거ㅈ
거
ㄱ
.
.
.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반복적으로 나에게 거짓말을 계속하다 보니 그게 거짓이라는 생각이 점점 옅여졌다. 나중에는 나의 말이 거짓이라는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나는 을 하고 있지 않아. 내 머리에서 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졌다. 그래야만 했다. 사실 나도 생일이 되면 축하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나의 과거가 너무 슬퍼질테니까.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는 경험을 하지 못했고, 나의 욕구를 그대로 표현해보지 못했고, 사랑이라는 건, 인정이라는 건 내가 잘했을 때 조건부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외롭고 공허한 건 모두 내가 못난 탓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사실 내가 받고 싶었던 건 선물이 아니라 부모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친구가 내민 선물이 너무 어색했다.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나 같은 사람에게 선물은 너무 과분한 거라서, 나는 못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서,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 꼭 함정 같아서. 그래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손을 위로 들고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주는 사랑이 너무 어색해서, 받아본 적 없어서, 그래서 그랬다. 생일에 받았던 상처들을 꾹꾹 눌러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숨겨놓았는데, 누가 선물을 주면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아픈데, 그 이유를 이제 와서 알려고 상처를 이리 짜고 저리 짜 봐야 아프기만 하고 고름은 나오지 않아서. 그래서 생일이 싫었다.
나를 사랑하지 못한 죄
나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불안해했다.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부채의식을 쌓아갔다. 선물이 빚이라도 되는 마냥 잘 기억해뒀다가 갚았다. 그러고 나서야 '어휴, 다행이다.' 한숨을 쉬고 '꺼억' 트림을 했다. 사랑과 관심이 나에게 있다는 게 어색해서 빨리 치워버리기를 바랐다.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겠다는 건 주제넘은 이야기였다. 나를 사랑하지 못한 죄의 형벌은 사랑을 줘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기꺼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