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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Nov 16. 2021

[인터뷰]바른 자세의 기원

H와의 인터뷰_2021.10.21


나의 바른 자세는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나는 출근과 퇴근, 술로 채워진 아빠의 삶을 보며 그 삶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빠의 어깨가 좁아질수록, 허리가 굽을수록 아빠의 모습이 더 싫어졌다. 그래서 허리를 피고 앉았다. 내가 아빠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어떤 식으로든 입증하고 싶었다. H 또한 나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았다.

습관은 하나 보이는데, 자세가 경직되어 있는 느낌이 있어. 뭔지 알 거 같아?
너의 경직된 자세? 자세가 제일 생각나. 바르면서 경직되어 있다?


나는 나의 모습이 아빠를 닮아가고 있지 않은지 자주 경계했다. 자세가 비뚤어지지는 않았는지, 허리가 굽어지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 바른 자세는 반-아빠(Anti father, 反父)의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힘이 잔뜩 들어갔다. 바르게 앉는 것 이면에는 아빠와 다른 사람으로 살겠다는 분노나 원망, 혹은 나는 아빠와 다른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강한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反, Anti)의 태도는 명확한 목표와 강한 에너지를 갖는다는 장점이 있다.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 명료하고 분명하다. 하지만 무언가에 대응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 대상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그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엇에 대한 반대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 대상이 사라지면 내 삶도 의미를 상실한다. 


비슷한 일을 이미 한 번 겪었다. 나는 엄마가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가 하는 모든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기대에 부응하려 했다. 나를 향한 비난도 모두 그대로 받아들였다. 엄마를 실망시킨 나를 자책했고 내가 더 잘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웃음을 보기 위해 애썼고, 불안해하는 엄마 옆을 지키려고 했다. 엄마를 보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나는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나는 엄마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사라진 애착 대상 속으로 들어가 매몰되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이상한 사람, 예민한 사람이었다. 나 하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면 우리 가족은 화목한 집이 되니까. 나 또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더 채찍질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삶은 더 힘들어졌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수 십 권의 책을 읽고, 논문을 찾고, 정신과에 내원하고, 상담사를 찾았다. 그리고 결국 내가 성인 알코올 중독자 자녀(ACOA)이면서 동시에 알코올 중독자이고,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공포, 회피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의 불안과 우울은 주변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른 사람을 너무나 손쉽게 판단해버리고 일방적으로 연을 끊기를 반복했다. 나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했다. 나는 가해자다. 내가 그렇게 원망하고 분노했던 사람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기억을 잃고, 변명하고,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는 거짓말을 반복하고, 불안해하고 힘들어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괴롭혔다.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래 놓고 나를 떠나게 만들거나 내가 떠났다. 


나는 나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황을 회피한 뒤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죄책감은 피해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내가 괴로워하고 있다며 합리화하기 위한  진통제에 불과하다. 정말로 변화를 원한다면 '피해자 되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장 배경이 나에게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았든 내가 타인에게 한 행동은 나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다. 피해자라는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타인에게 트라우마를 대물림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관계에 미성숙한 사람이고 불안하고 우울한 사람이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나서야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까지 나는 아빠와 다른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 삶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최소한 나는 아빠와 다르다고. 그걸 요술 방망이처럼 휘두르면서 면죄부로 활용하려고 했다. 그게 나의 가장 큰 잘못이었다. 내 인생을 배신했고, 나를 믿어준 사람들을 배신했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의 삶이 보였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악마는 아니었다는 걸 말이다. 그들도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용기 내서 사과하고, 고백하고, 용서하고, 때로는 배신감에 관계를 끊기도 했다. 아빠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인생은 내 생각처럼 흑과 백으로 나눠지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나는 백의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흑과 백을 오가는 그저 그런 보잘것없는 하나의 인간에 불과했다. 늘어지고 비대해진 자의식과 피해의식이 나와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걸 막고 있었을 뿐이다.


아빠를 향한 원망은 내가 힘을 줄수록 더 강해졌다. 바른 자세로 앉겠다고 허리를 필 때마다 강해졌다. 어깨를 필 때마다 강해졌다. 너무 늦지 않게 놓아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힘을 빼고도 자연스럽게 앉을 수 있으면 좋겠다. 가볍고도. 바른 자세로.


자연스러운 바름이 아니다? 딱딱하다?
신경 쓴 자세 같기는 한데. 딱 그래 보이기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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