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https://howtostudy.tistory.com/17
“연등(중대 독서실)을 신청한 사람이 일병과 이등병 밖에 없나? 제발 선임들은 공부 좀 해라. 교육 때 보면 이등병 때 교육했던 것을 어째 병장 때도 똑같이 가르치냐?”
당직사관이 우리 내무 실에 와서 한 말이다.
내가 2년 동안 군인으로서 근무한 곳은 논산의 육군훈련소다. 이곳에서 내가 주로 하는 일은 훈련병을 5주 동안 교육하는 것이다. 훈련병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공부를 주로 하는 계급은 이등병이나 일병뿐이다. 나 또한 일병 때까지만 공부하고 상병이 되면서 피곤하다는 이유로 공부를 하지 않았다.
세상도 내가 근무한 군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의무적인 교육이 끝나면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우리 팀의 J선수가 있다. 나는 J선수를 지도하면서 J선수에게 많이 보고 배웠다.
J선수는 2005년 4월에 교통사고로 척수(가슴 밑으로 움직이지 못함) 장애인이 되었다.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G대학교 공대생이었다. J선수는 척수 장애인이 되면서 생각하는 사고가 바뀌었다. 식사를 하러 식당을 가도 테이블이 있는 식당을 찾기가 어려웠고, 찾더라도 턱이 있어 문지방을 넘지 못했다. 이런 경우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J선수는 장애인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을 주고자 G대학 공학과를 자퇴하고, S대학교 사회복지학과로 다시 입학하였다.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던 J선수는 주민등록 등본이 필요해 동사무소를 갔다가 장애인복지관 체육 교사의 눈에 띄어 우리 팀에 들어왔다. J선수는 낮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학과 공부를 저녁에는 휠체어 농구 선수로 훈련을 병행했다. 열심히 공부한 J선수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재활병원에서 장애인들을 상담해주는 상담사로 취직을 했다. J선수는 상담하러 오는 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노력에 비해 장애인들이 받는 혜택은 적었다. 그래서 많은 장애인들에게 더 좋은 혜택과 정보를 주기 위해 척수협회로 이직을 하였다. 이직은 한 J선수는 재활병원에서 상담사로 일할 때보다는 더 많은 정보와 혜택을 장애인들에게 줄 수 있어 좋았지만, 본인의 미래에 대해 매일 불안했다. 그래서 척수협회를 몇 해 다니다 퇴사를 하였다. 그리고 본인 나이 36살 되던 해에 공무원이 되겠다고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시작한 J선수는 그다음 해 본인 나이 37살에 공무원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나는 J선수에게 열심히 공부를 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J선수는 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공무원이 된 이유는 두 가지야. 첫째는 척수협회에서 일하면서 장애인들에게 많은 정보와 혜택을 주어 너무나 좋았어. 그래서 더 많은 정보와 혜택을 줄 수 없을까 하는 고민에 공무원이 된 것이고, 둘째는 나의 미래에 대해 매일 밤 불안했어. 내가 장애인이다 보니 조금 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어 공무원이 된 거야.”
뇌 과학자인 이시형 박사는 ‘불안한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끝없이 배우는 사람만이 새로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다.”
나 또한 매일 밤 세계 각국에 휠체어농구 비디오를 보며 분석하고 기록한다. 세계 휠체어농구 전술도 계속해서 변화고 있기 때문이다. 휠체어 농구에 대해 분석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세계 여러 나라의 휠체어농구를 더는 따라갈 수 없다. 이제는 자기 분야에 대해 공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예전에는 알고 있는 지식으로 하루하루 버텼지만 이제는 버틸 수가 없는 세상으로 변화였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해간다. 내가 공부하지 않으면 나는 물론 팀 또한 도태되고 만다.
팀을 도태시키지 않기 위해 매일 밤 비디오를 보면서 분석하고 기록하는 감독이 있다. 바로 한국 핸드볼의 기적을 이룬 열정적인 행동가 정형균 감독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정형균 감독이 이끄는 한국 여자 핸드볼은 독창적인 새 수비 전술인 ‘대각 전진수비’를 앞세워 예선부터 파란을 일으킨 끝에 결승에 올랐다. 적수가 없어 보였지만, 반면 한국의 새 전술도 조별리그와 토너먼트가 이어지면서 어느 정도 상대에게 노출됐다.
노르웨이와의 결승전. 노르웨이는 조별 예선에서 한 번 만났다. 당시 한국은 생소한 수비 전술로 노르웨이 선수들의 혼을 빼놓으며 27-16, 11골 차로 승리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이겨야만 진짜 목표인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다. 무조건 ‘이기는 승부’를 해야 했다. 정 감독은 선수들에게 ‘60분짜리 여행’을 언급하며 경기가 시작되면 대각 전진수 비인 ‘파이브원(5-1)’ 대신 ‘식스 제로(6-0)’ 수비로 일단 상대에게 리드를 내주며 출발하도록 했다. 핸드볼은 리듬의 경기다. 일단 상대를 마음 놓게 한 뒤 다시 우리의 장기인 수비 전술을 가동했을 때 상대가 갑작스러운 벽을 느끼고 당황하게 되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초반 10분 정도는 2~3골 차 리드를 내줬다. 그러다 7-7 동점부터 다시 고삐를 틀어쥐었다. 한국은 이후 내리 9 득점하면서 노르웨이에는 단 한 점만 내줬다. 전반전이 끝났을 때 스코어는 16-8, 8골 차 리드였다. 후반전 역시 예상한 흐름대로 결판이 났다. 최종 스코어 28-21.
자국 개최였던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우승했던 한국은 핸드볼의 고향인 유럽에서 열린 대회에서 올림픽 2연패라는 대위업을 달성했다. 한국 구기 사상 올림픽 2연패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다시 3년 뒤 정형국 감독이 이끄는 여자 핸드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개최로 열린 1995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8전 전승으로 우승한다. 흔히 올림픽보다 어려운 게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이라고 하는데, 한국 핸드볼 역사에서 단 한 번 이뤄진 쾌거다. 이로써 한국 여자 핸드볼은 1990년대 명실공히 세계 정상을 구가했다. ”(자료출처-대한민국 승부사들, 꿈의지도)
팀의 리더뿐만 아니라 사람은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성공으로 가는 다리는 공부뿐이다.
『하버드 새벽 4시 반』의 웨이슈잉 작가는 ‘공부’에 대해 본인의 저서에다 이렇게 서술했다.
“배움은 누구에게나 성공으로 가는 다리와 같다. 쉬지 않고 꾸준히 공부해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회가 멈추지 않고 발전하듯 공부도 멈춰서는 안 된다. 배움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처럼 노를 젓지 않으면 후퇴하기 때문에 공부를 통해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전자기기가 시간이 지나면 구식이 되고 사용할 가치가 있는 기능도 줄어드는 것처럼 지식 역시도 마찬가지다. 오래된 지식은 늘 새로운 지식으로 교체된다. 특히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은 2~3년만 공부하지 않아도 완전히 낡은 것이 되고 만다. 끊임없이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성실하게 공부하라.”
공부만큼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큰 투자는 없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사고가 확장되고 유연해진다. 그러면 나의 내면은 뒷동산처럼 넓고 높게 변해 태산과 같은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