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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omanist Dec 05. 2023

오늘 한 곡, 미칠 듯 차가운 열정

오늘 한 장, Emma Stone - Audition(라라랜드 OST) 

 조각글 모음은 노래를 듣고 떠오른 이미지를 글로 옮기는 글쓰기 연습 프로젝트입니다.

 주관적인 창작글이니 가볍게, 노래와 함께 즐겨주세요.


https://youtu.be/enu0ni6p3bs?si=8gbySJmeNCnf01BR

Emma Stone - Audition(The Fools who Dream) / La La Land OST

 푸른 달이 차오른다. 옆에선 빛을 잃어가는 태양이 붉게 기운다. 초저녁이면 달과 태양이 함께 떠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결코 양립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둘이 같은 하늘을 공유했다. 꿈과 현실도 그럴 수 있을까, 맥주를 삼킨다.
 
 센 강을 타고 에펠 탑 조명이 흐른다. 파리 전체를 감시하듯 강렬한 빛줄기가 잠든 도시를 핥았다. 계단에 걸터앉아 달과 해, 센 강과 에펠탑을 화폭에 담았다. 연필이 화폭 위에서 흐를 때 물결치는 진동이 좋았다. 선을 긋노라면, 그 선이 모여 점점 눈에 보이는 풍경과 닮아가면, 끝끝내 마음속에 담아둔 파리의 낭만이 화폭에 담긴다면.
 
 이 도시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림이 좋아 미대를 진학했지만, 입시 미술로 습관이 된 선은 전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림을 배웠지만, 모두가 같은 그림을 배웠다. 예술을 하려 했지만, 취업이 되는 미술은 따로 있었다. 그렇게 꿈을 잃고 헤매던 현실의 벼랑 끝에서, 여행을 떠올렸다.
 
 동기는 사실 피난에 가까웠다. 취업에 대한 도피였고, 꿈에 대한 회피였으며, 현실에 의한 추방이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직장인이 되기엔 나의 젊음과 낭만, 열정에 미안했다. 보다 많은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현실에 아무리 짓눌려도, 꿈을 꿀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치열하게 살았기에 오히려 잊고 살았던, 꿈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꿈을 좇아 떠났다. 현실에 쫓겨 떠났다.
 
 무작정 떠난 여행은 어떤 계획도 없었다. 막연히 유럽 여행을 하고 싶었고, 한 달 정도면 만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마침 모아둔 돈도 없지는 않았다. 첫 여행지는 평소 동경하던 파리로 정했다. 그저 에펠탑이 보고 싶었고 낭만의 도시라 하니 궁금했다. 이후 계획은 에펠탑을 보고 맥주나 마시며 정하려 했다.
 
 여행 첫날, 숙소에 짐을 풀고 사요 궁으로 향했다. 파리 야경 명소라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갔다. 애매하게 내리는 빗줄기에 거리는 생각보다 한산한 모습이었다. 불어오는 비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에펠탑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렇게 도착한 사요 궁에서 바라본 에펠탑은, 센 강은, 파리는.

 낭만이었다.

 파리를 가득 담고 흐르는 센 강은 끝없이 반짝였다. 가장 밝은 빛은 단연 에펠 탑이었다. 파리를 대표하듯 흰 빛을 사방에 뿌리는 에펠탑은 그 자체로 낭만이었다. 해가 뜨면 뜬 대로, 지면 진 대로. 파리라는 도시는 낭만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센 강과 에펠탑을 바라보길 이틀. 다음 여행지를 고민하며 올려다본 초저녁 하늘엔 달과 해가 함께였다. 하늘은 달과 해를 품고 붉게 타올랐다. 강렬한 붉은빛의 달과, 오히려 차분한 해의 모습은 하늘이란 화폭 안에서 괜스레 낯설었다. 봐선 안 될 비밀은 본 기분이었다. 동전의 양면이라 생각한 달과 해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혼란스럽게 섞여 다가왔다. 그 붉은 하늘의 비밀 아래서, 에펠탑과 센 강은 타올랐다. 보다 푸르게 타올랐다.

 우리는 언제나 균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 선택의 순간에선 꿈과 현실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 같았다. 결코 함께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올려다본 하늘은, 그 안에 담긴 달과 해는. 같은 선상에서 나란히 빛나고 있었다. 해처럼 붉게 타오르는 달과, 달처럼 차갑게 식은 해의 모습으로. 그런 하늘 아래서 센 강과 에펠탑은, 파리는 낭만을 주었다. 꿈과 현실은 이상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함께 할 수 있다고 말해줬다.

 그 길로 화구를 장만해 사요 궁에 눌러앉았다. 내가 본 이 하늘을, 달과 해를, 센 강과 에펠탑을 온전히 화폭에 담고 싶었다. 한 장의 그림일 뿐이지만, 이 그림을 완성하면 한국에 돌아가서도 결코 꿈을 잃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다른 이들에게도 꿈을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그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해와 달을 같은 하늘에 담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파리 전체를 그리고도 해와 달을 그리지 못해 다시 그리기 일쑤였다. 심지어 낭만적으로 보이던 파리가 어떤 날은 교도소처럼 보이기도, 쇠처럼 차갑게 죽은 도시로 보이기도 했다. 자연히 화폭 속 파리의 얼굴도 다양하게 변화했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짜가 점점 가까워졌다. 계획 없이 온 유럽 여행은 파리에서만 오롯이 한 달을 채워가고 있었다. 미술 전공자라면, 아니 여행객 누구라도 들렸을 루브르나 오르세도 가지 않았다. 오직 센 강과 에펠탑만을 바라보며, 한 달이란 시간을 채워 나갔다. 그림은 조금씩, 그날의 하늘을 닮아갔다.

 출국 전날, 달과 해만이 칠해지지 않은 채 그림은 완성됐다. 수많은 붉은색과 푸른색을 만들고 칠해봤지만, 마음에 드는 달과 해를 찾지 못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많이 쓰인 그림은 한눈에 보기에도 강렬했다.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과, 파리가 지닌 낭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리고자 한 것은 열정과 낭만만이 아니었다. 공존을 그리고 싶었다. 해와 달의 공존. 꿈과 현실의 공존. 이상과 현실의 공존. 낭만과 현실의 공존. 그 망할 놈의 현실과의 공존.

 파리에서 처음으로 밤을 지새웠다. 비행기 시간은 다가오는데, 그림은 미완이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 그림은 파리에서 완성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적당히 타협해서 완성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모든 여행의 시간이, 그 속에서 찾은 낭만과 열정이, 길을 잃었던 꿈이 이 화폭 하나에 온전히 담겨 있었다. 타협이란 있을 수 없었다.

 날은 점점 밝아 왔다. 달이 지고 해가 떠오르려 했다. 지는 해는 매일 같이 봐왔지만, 떠오르는 해는 처음이었다. 고민은 계속됐다. 어스름이 거치고 날이 밝아왔다.

 깊은 한숨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봤다. 타오르는 숯불 마냥 시뻘건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 옆에, 달이 있었다. 에펠탑을 닮은 푸른 초승달이. 초저녁에 보던 달과 해와는 달랐다. 붉은 해와, 푸른 달. 이젠 낯설지 않은 해와 달이 동을 트고 있었다. 붉은 달과 푸른 해, 붉은 해와 푸른 달. 초저녁과 새벽.
 
 마침내, 둘의 색을 정할 수 있었다.
 
 에펠탑을 마주하고 일어섰다. 한 달을 함께한 파리에게 인사를 고했다. 화구를 정리하고 짐을 챙겼다. 이젠 한국으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손엔 완성된 낭만과 열정이 들려 있었다. 꿈이 들려 있었다. 여행엔 그 어떤 아쉬움도 없었다.

 여행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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