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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Jan 22. 2021

눈물이 멈추지 않아 정신건강의학과를 갔다. - #1

우울증 진단을 받은 2년 전을 회상하며


1. 우울증 진단을 받은 2년 전을 회상하며

나의 상판때기까지 불편하셨던 고객님과의 만남이 방아쇠가 되었다.

OO역 종합안내소에서 야간 근무를 하던 어느 날 저녁, 한 고객이 기차 어플을 이용하기 위해 인증이 필요한데 그것이 안 된다고 찾아왔다. 어플을 왜 이렇게 만들어놓았냐고 해서, 제가 한번 보고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나는 회원 로그인을 위해 기차 어플과 연동된 인증 어플에 접속했지만, 그 어플이 자꾸만 강제 종료가 되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인증 어플이나 핸드폰에서 오류가 있는 부분인 거 같아 바로 해결이 어려울 것 같고, 한번 알아보겠다고 말하고 해결 방법을 검색해보려던 찰나였다. 아마 그 고객은 이런 내 말은 다 듣지 않았거나, 나의 기계적인 태도에 오해를 했던 것 같다. 그 고객은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어플을 이따구로 만들어놓고 내 핸드폰이 이상해서 도와줄 수 없다는 게 그게 할 소리야? 그게 정상이냐고?”

그래서 ‘죄송한데 그런 뜻이 아니다, PASS 인증 어플이 왜 자꾸 강제 종료되는지는 기술적인 문제라 저도 잘 모르는 부분이라 알아봐야 할 것 같다는 뜻이었다’라고 설명했지만 고객은 계속 말꼬리를 잡아 나를 비난했다. '그걸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어플을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어놓고 직원이 할 소리냐' 등등.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해서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고객님 제가 분명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도, 자꾸 제 말에서 꼬투리를 잡으면서 제가 고객님 어플의 오류를 해결할 방법을 알아보는 걸 못하게 하신다면 저도 더 이상 도와드릴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옆에 있는 직원이 덜덜 떨며 그 고객의 문제를 도와주었지만 그 고객은 악담을 멈추지 않았다.


“어플을 이딴 식으로 만들어놓고 뭐 하자는 거야. 진짜.”

그리고 옆에 있는 직원에게 나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나를 험담하기 시작했다.


“저년 쌍판때기를 봐봐. 딱 재수없게 생겼잖아 진짜.”

다행히 그 후로 어플 강제 종료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그 고객은 자리를 떠났지만 떠나는 순간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고 갔다. 그때부터 나는 회사를 다니며 그동안 참아온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2년이 넘게 그 일을 하면서 겪은 폭언이나 사건들에 비하면, 그날의 사건은 별 거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이미 마음의 에너지가 방전된 상태였다. 다음 날 퇴근시간까지나는 종합안내소에 앉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일했다. 무표정하게 눈물을 계속 닦아내서인지, 눈물을 멈추지 않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지도 않고 많은 고객들이 평소처럼 문의를 해왔고 나는 답을 해주었다.


드디어 퇴근시간. 전철에 앉았는데 집까지 가는 한 시간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숙직 방에 있던 개인 수건을 손에 들고 눈물 콧물을 닦으며, 전날 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 검색해 놓은 정신의학과를 찾아갔다. 예약 후에 와야 하는 곳이었지만, 병원 직원께선 예약이 빈 시간에 진료를 볼 수 있도록 해줄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순간까지도, 의사 선생님과 대화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었다.

의사 선생님께 나는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민원업무로 가장 힘든 시기에는 그걸 견디느라 우울한 줄도 몰랐어요. 근데 휴직이 끝나고 복직한 후에, 다시 그 일을 또 회사에서 하라고 하니 너무 고통스러운 거예요. 이미 아는 고통을 또다시 시작한다는 게 너무 힘들어요.”

사실 어머니의 간병휴직을 쓰기 전 이 조직에서 나는 호구이자 은따였다. 한 후배는 의문이 든다는 표정으로 물다. “언니는 종합안내 일을 좋아하나 봐요?” 또 다른 한 후배는 짠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언니 일하는 거 보면 안쓰러워요.” 아무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버티고 있는지 몰랐던 것 같다. 나도 말할 가치를 못 느꼈었다.

종합안내 업무가 주어지면 적성에 맞는 직원이 아닌 이상, 보통 직원들은 떠날 방도를 찾아 6개월에서 1년 사이 다른 업무 담당이 되곤 했다. 분위기상 민원 담당은 ‘나만 아니면 돼’였고, 그 업무에 계속 앉아있던 나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사실, 의지할 곳이 없었던 건 내가 동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탓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고통의 정점이었던, 아니 뗀 굴뚝에도 연기가 났던 시절

“내가 쟤 때문에 종합안내 오게 생겼잖아.”

내가 바로 뒤에 있는 걸 인지한 상황에서도 나의 동기에게 나를 쟤라고 칭하며 대놓고 욕을 하는 선배가 있었다. 자기 때문에 본인이 종합안내 업무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 나는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단둘이 있을 때 물었다. 아까 하신 이야기가 무슨 뜻이냐.

“너 지금 종합안내하기 싫어서 환장했다고 다 소문났어.”라고 그는 대답했다.


팀장이 2년 간 종합 안내를 맡은 나를 다른 업무로 바꾸겠다고 먼저 말을 해왔다. 나는 ‘이 업무로 올 직원이 없지 않느냐. 올 사람이 없다면 억지로 바꾸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지만, 팀장님이 바꾸면 된다고 해서 그걸 또 굳이 반대할 생각도 없었다. 계속 지금 일을 하라고 해서 계속했고, 바꾸라고 하면 바꾸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정반대의 소문이 났다. 누구누구의 탓인지는 짐작이 가지만 잊고 싶으니 여기까지.

결국 나는 그 사건 이후 또 얼마간의 기간 동안 종합안내소에 외롭게 눌러앉아 있었다. 그날 눈물을 터트리며 ‘저는 무조건 종합안내에 있겠다.’고 팀장님께 말하는 나에게 아무도(같은 방을 쓰는 직원 외에는) 위로 한마디 없었다. 뒤에서 헛소문을 퍼뜨리기에 바빴다. 그런 조직의 우스운 모습을 보니 한심했다. 그래서 나도 입과 마음을 닫았다.


그 시절에 비하면 정신건강의학과에 갔던 2년 전 나의 상황은 양반이었다. 진짜 힘들만한 시절도 버텨냈는데, 별거 아닌 ‘상판대기 드립’ 고객에 무너지는 내가 너무 싫었다.

힘들게 산을 오르는 즈음보다, 그 산에서 하산하고 있을 즈음 넘어지고 다치게 되는 것인가 보다. 그게, 내가 약한 사람이어서는 아니었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절엔 내가 약해서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 아팠다.


“너는 이제 고통스러운 산에서 거의 내려왔고 그곳에서 내려오는 길에 넘어진다고 해서 약한 것이 아니다.”는 말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나도, 주변인도 막상 하지 않는 말이다. 그래서 병원이 필요한 것 같다.


겨울이던 우울증 환자에게
따뜻한 봄이 오면
얼음이 녹으면
그것은 눈물이 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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