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성에서 당장 나오시오
내 집 마련에 대한 마음을 정하기 전 나는 막막한 마음에 용하다는 무당을 수소문하여 찾아갔다. 행복주택 계약이 1년도 남지 않았고 그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마음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계약이, 끝나가지 않아요?"
내가 앉자마자 대뜸 무당은 말했다.
이사를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는 나의 말에 무당은 대답했다.
"얼른 이사 가세요. 거기 살면 계속 몸이 아플 거예요."
내가 놀랄 수밖에 없었던 건 그 말은 나의 어머니가 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행복주택으로 이사 간 후로 계속 아프다고 한다고 했다. 혹시 그 동네가 전에 살던 동네에 비해 너무 조용해서 나랑 안 맞는 게 아니냐고 말하며 엄마는 생각에 잠겼다. 나를 처지고 우울하게 만드는 동네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엄마의 의혹은 꽤 맞는 것 같았다.
감사한 가성비의 '행복주택'에 사는 동안 공교롭게도 나의 인생은 가장 '불행'했다. 아파트 단지만 덩그러니 들어서 있는 그 동네는 마치 나에게 고립된 '성'처럼 느껴졌다. 그곳에서 힘들었던 개인사를 겪고, 팬데믹을 겪고, 병원에 계속 출입하면서 나는 서서히 침잠하고 있었다. 거주 6년이 되니 집은 포화상태였다. 작은 짐들이 원룸을 가득 차지해 이불 펴고 누울 공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초반에는 희고 깔끔하게 유지했던 베란다 벽에 곰팡이가 잔뜩 피어 있었다.
이사를 가고 싶은 곳도 없고, 집을 월세로 구할지 전세로 구할지에 대한 계획도 없이 살다가 무당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녀에게 현명한 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다. 미래를 볼 대단한 능력을 인간이 가질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저 평범한 사람보다 조금 더 영적인 사람이 나의 기운을 어떻게 느낄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녀는 꽤 정확히 나의 기운을 파악했다. 내가 어떤 상태로 살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곳에서 어떻게 6년이나 참고 살았냐며 최대한 빨리 이사를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사 말고 지금 내게 들어와 있는 다른 기운이 있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이사운이 가장 크고 중요하며 잘 준비해서 가라는 게 그녀의 결론이었다. 어느 동네로 가는 것이 좋을지 구 단위까지 찍어주는데 이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동네만 찍어주는 그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생각했다.
역시 무당도 미래는 잘 모르네.
내가 서울에 있는 집을 구하지 못할 거라는 건 나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이사도 기세가 필요한 일
나는 그날 이후 부지런히 이사 계획을 세웠다. 다년간의 통원 치료도 끝났다. 다음에 또 아프면 다시 오겠다는 나의 말에 교수님은 '이제는 더 아플 일 없을 거다'라며 인술을 행하셨다. 이제 움직이는 일만 남았다. 듣고 싶었던 부동산 원데이 클래스도 들어보고, 공인중개사를 만나 전세 제도에 대해 토론도 해 보면서 나는 관심도 없던 분야에 대한 생각의 지평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통해 배운 건 단순한 부동산 지식이 아니었다. 성 밖의 넓은 세상에 대한 배움이었다. 나는 의아해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렇게 떠나고 싶었으면서 왜 나는 스스로 계속 갇혀 지냈던 것일까?
그 성은 이제 나오시오
30대 중반. 그때까지 나는 <좋은 곳으로 떠나기 위해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살기 위해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완성해야만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성 밖으로 한 번 나가보았다면 좋은 세상이 보였을 것이다. 후회는 언제나 늦지만 지금이라도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가지 않는 성은 감옥이라는 것을, 성을 나간 후에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