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집주인을 만나 깐깐한 임차인이 되었다
고시텔을 나온 이후 나는 3번 더 월세방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취업준비생 시절부터 사회초년생까지 나는 3번의 이사를 다녔다.
첫 번째 방. 다양한 소리가 들리는 모닝콜 주택
여러 개의 원룸들이 복도식으로 나열되어 있는 다세대 주택에 살았다. 중문이 없어서인지 주택 구조 자체의 문제였는지 방음이 매우 취약했다.
위층에서 부부싸움 하는 소리가 일주일에 몇 번은 들렸는데 항상 물건을 던지는 소리, 욕설을 하는 소리, 여자의 통곡 소리 순서로 전개되었다. 그 루틴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저 집에 무슨 사건(?)이 터지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경찰에 신고할까도 깊이 고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다음 주에도 그들은 싸웠고 나는 그들이 죽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침에는 모닝콜을 하지 않아도 잠이 깼다. 집을 나서는 사람들이 문을 여닫는 소리가 꽝꽝 들렸기 때문이다. 강제 아침형 인간이 된 것은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도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시며 술게임을 하는 소리에는 화가 났다. 대학생의 방이었는지 여러 명의 젊은이들이 밤새 손뼉 치고 소리 지르며 술자리를 하고 있었다. 술자리 중간에 복도에 잠깐 쉬러 나온 학생들이 서로 욕설을 주고받는 것도 들렸다. 조용히 해달라는 포스트잇을 방 앞에 붙여놓자 그것을 읽었는지 복도에서 크게 또 욕설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인턴 출근을 해야 하는 스트레스가 컸던 나는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층간소음 분쟁으로 이웃 간에 살인 사건이 많아 뉴스에서 이를 집중 보도하던 시기여서였을까. 경찰은 나의 낮은 목소리 몇 마디를 듣더니 즉시 출동하여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살면서 개인적인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해본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다.
두 번째 방. 이따금 무서웠던 빌라
배송기사님께 죄송해 인터넷 주문을 할 수가 없어 직접 생수를 사서 4층 계단을 오르내린 방이다. 그래도 젊었기에 크게 힘든지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문 앞 복도에서 바퀴벌레와 인사할 때는 크게 놀랐다. 화장실 문을 열면 화장실 바닥에서도 바퀴벌레가 나를 반겨주니 화장실 문을 열때마다 설마하는 공포가 있었다.
그보다 더 싫었던 것은 동네 분위기였다. 정장차림으로 귀가하던 퇴근길의 나를 보고 술 한잔 하자며 따라오는 남자도 있었고,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뜬금없이 나의 팔목을 잡았던 남자도 있었다. 인턴기간 잠시 머무르느라 동네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단기 원룸을 찾았던 것이 후회됐고 나는 빠르게 그 집을 탈출했다.
세 번째 방. 집을 매우 아끼는 집주인 할머니가 있는 단독 주택
사회초년생 때까지 학자금대출을 상환하던 나에게 전세자금대출은 사치였다. 나는 서울 끄트머리의 보증금 300에 월세 30만원짜리 원룸을 구했다. 이보다 싸게 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작은 원룸도 없었을 것이다. 고시원 구조에 싱크대가 하나 추가된 정도였다. 미니 침대에 누워 한 사람이 자면 바닥에 다른 한 사람이 발 뻗고 누울 공간도 없었다. 키가 160 이하인 친구만이 유일하게 바닥에서 발을 뻗고 자는 게 가능한 집이었다. 하지만 20대 후반의 젊은 나였기에 가성비에 만족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위층에 사는 깔끔한 집주인 할머니는 내가 바퀴벌레를 목격했다고 말하면 재빨리 방역 업체를 불러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깔끔함이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1층의 작은 방은 내가 임차해서 살고, 위층에는 주인집 식구들이 사는 구조라 치안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샤워를 하고 방에서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고 있을 때, 주인집 할머니가 마당에서 내 방 창문을 여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소리를 지르자 할머니는 불이 꺼져있어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며 황급히 문을 닫았다. 1층 방에 환기가 되지 않으면 곰팡이가 생길까 봐 조마조마했던 할머니는 나 모르게 주기적으로 내 방 창문을 열고 닫고 있었던 것이다. 방의 주인인 내가 정기적으로 환기를 하고 있었지만, 주인집 입장에서는 내가 창문을 늘 닫고 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집 식구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으면 프라이버시를 위해 창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엄연히 임차인이 있는 방의 창문을 마음대로 여는 것은 큰 문제였다.
월세 사는 서러움은 추운 겨울날 정점을 찍었다. 우동을 포장해서 퇴근하던 그날. 하필 그날 도어락이 고장 나서 방문이 열리지 않았다. 추운 날씨에 방전되었을까 건전지를 새로 사서 교체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도어락을 확인해 보니 제조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제품이었다. 나는 집주인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도어락이 오래돼서 고장 났어요. 일단 제가 지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니 근처 기사님을 불러서 새것으로 교체할게요. 고치고 난 뒤 수리비를 청구해도 될까요?”
집주인 할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도어락이 고장 난 것은 나의 책임이니 수리비를 줄 수는 없다고 말이다. 나는 도어락이 오래돼서 고장 났고 월세집인데 내가 도어락 구매 비용까지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할머니는 듣지 않았다. 추운 날 화가 난 나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영하에 밖에서 계속 서 있을 수도 없으니 저는 일단 기사님 부를 거고요. 수리비 청구할 테니 주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근처 카페라도 들어가 주인과 차분히 전화통화를 하기에는 포장해 온 우동도, 내 마음도 식어가고 있을 때였다. 나는 바로 기사님을 부른 뒤 수리 영수증 사진을 집주인 문자로 전송했고, 나를 못 믿으시겠다면 기사님께 물어보라며 수리 기사님 연락처도 알려드렸다. 그래서 죄 없는 수리 기사님이 곤란을 당했다. 집주인은 수리 기사에게 전화해 이것저것 물어보며 수리 기사님을 괴롭혔다고 한다.
집주인이 도어락 구매 비용을 줄 수 없다고 답장을 보냈다. 나는 답장했다.
“그럼 도어락 제 돈으로 샀으니 이사 나갈 때 제가 뜯어가도 되는 거죠? 그럼 도어락 다시 사야 하는 건 마찬가지인데요. 고장 난 도어락 보관하고 있는데 그거 드릴까요?”
고장 난 도어락을 받은 집주인은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했던지 도어락 구입비를 나에게 이체해 줬다. 그러면서 본인이 집주인이니 새 도어락의 카드키를 하나 달라고 요구했다. 그 바람에 나는 또 집주인과 의견 충돌이 생겼다.
“화장실 청소 들어가서 가끔 해 줄 테니 문 좀 열어줘요.”
집주인 할머니가 종종 하던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거절했다.
“이사 나갈 때 제품 설명서랑 카드키 전부 다 챙겨 드릴 테니 지금 가져갈 생각하지 마세요.”
이사 나가기 전에도 골치 아픈 적이 있었다. 묵시적 계약 연장으로 그 집에 계속 살던 나는 퇴거 3개월 전 이사 의사를 밝혔다. 집주인은 다음 임차인을 구해야 내게 보증금을 빼 줄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 집주인이 한동안 임차인을 구하지 못하자 나는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예쁜 방 사진을 찍어 부동산 직거래 카페에 광고글을 썼다. 그 광고글을 본 다른 임차인이 바로 월세 계약을 했고 나는 그렇게 그 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사 가던 날,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 집주인 할머니는 문자로 감사 인사를 보내왔다.
“깨끗이 살아줘서 고마워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할머니는 성경 말씀을 적어 원치 않는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지겹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번호를 차단했다. 월세 계약도 신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곱씹으며…….
깐깐한 임차인과 깐깐한 임대인. 만나서는 안 되는 인연이었다.
그래도 그 집에서 다들 잘 돼서 나갔다고 방을 소개하던 할머니의 첫 미소가 떠오른다. 그리고 행복주택 청약이 되어 이사를 한다는 나의 말에 잘 돼서 다행이라던 집주인 할머니의 마지막 미소도 생각난다.
월세를 깎는 대신 관리비를 받겠다는 집주인의 계락에 넘어갈 정도였던 순진한 나를, 깐깐한 사람으로 성장시켜 준 월세의 추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