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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차린 저녁

일. 탈.

by 딱하루만
커버이미지 설명: 국수가 소복히 담긴 그릇


띠띠띠띠~ 띠리링~ 현관문 따는 소리가 들린다.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왔다. 애들 저녁을 다 먹이고 치운 후라 설거지하다 말고 또다시 저녁을 차렸다.

남편의 숟가락을 식탁에 놓는 순간,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휴대폰과 이어폰을 들고 도망치듯 집을 나와버렸다. 나에겐 일탈이었다. 저녁을 차려주다 말고 나와버린 일탈.


아이들에겐 내일 아침에 해 줄 카레를 사러 나간다는 속없는 핑계를 대고, 남편에겐 밥을 차려주다 말고, 난 현관문을 열고. 그렇게 나와버렸다.


답답했다. 원망하는 말이 생겨버린 거다. 생겼는데 말을 참고 있으니 답답했던 거다. 당신도 회사에서 힘들었겠지만, 나도 힘든데 저녁을 안 먹고 온다고 미리 연락이라도 하든가, 왜 두 번씩 저녁을 차리게 하냐고 말하고 싶었던 거다. 저녁을 안 먹고 들어오면서 내게 밥을 요구하는 그 당연함도 싫었다. 저녁상 한번 더 차리는 게 뭐가 대수냐 싶고 차리면 그만이지만, 난 남편의 엄마노릇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이 차 앞 유리에 붙은 주차위반 스티커처럼 내 안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말들을 감정을 묻힌 채 쏟아내고 싶지 않았다. 본인도 날 배려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한 게 아닐테니까. 살아온 대로 움직였을 뿐이니까. 그래서 못한 거니까.


여하튼 난 그 원망의 말들이 속에 있으니 답답했다. 고구마를 3개쯤 꾸역꾸역 정신없이 먹은 것 같았다.



원이가 책을 보고 그린 고양이 그림




걷기 시작했다. 그냥 걷고 싶었다. 낮에 걷기 운동하는 코스로 걸었다. 밤에 보이는 이 길은 색달랐다.

돌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계속 걸었다. 걷다가 3미터쯤 앞에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앉아보니 방금 전 걸어왔던 반대편 길이 보였다. 그리고는 잠시 모든 게 정지화면처럼 느껴졌다.


맞은 편에서 본, 내가 걸어왔던 길


내가 걸어온 그 길이 참 예뻤다. 10미터마다 켜져 있는 가로등이 내 속을 밝혀주는 듯했다. 저 길을 걷고 있었을 땐 그 길이 얼마나 이쁜지 모른 채 답답한 내 속만 생각하며 있었구나 싶었다. 이렇게 뚝 떨어져 봐야, 걷고 있던 그 길이 이쁜지 알게 되는 어리석음에 피식 웃음도 났다. 내 삶도 지나고 보면 지금의 이 순간이 얼마나 많이 누리고 있었는지 뒤늦게 알게 되겠지. 그렇게 뒤늦게 깨닫는 어리석음은 이 순간 끝내버리고 싶었다.


건강한 몸으로 성실하게 일하는 남편,

웃음과 까불거림으로 날 웃겨주고 싶어 하는 아들,

쉴 새 없는 흥얼거리며 거울 앞에서 춤추는 딸,

편히 잘 수 있는 방,

일이 잘 안 풀릴 땐 도와달라 말할 수 있는 동료들,

갖고 있는 재주로 언제든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동생들,

가끔씩 생기는 프로젝트를 같이 하자고 말할 수 있는 팀원들.

그 외에도 내 주변엔 보물 같은 일들이 참 많다.

지금! 딱 지금 알고 감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잊지 않기 위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이가 그림 그리고 엄마는 글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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