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환,〈눈사람〉,〈에필로그〉
그는 떠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말은 영원히 슬퍼하겠다는 말일까. 둘이 서 있던 자리에 혼자 남은 채로 오래도록 기다리는 마음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시간은 끝이 나는데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끝나지 않는다면, 그 결말은 슬픔에 스러져 가루처럼 흩날리는 일뿐일까. 어쩌면 충분히, 더 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 마음은 언젠가 슬픔도 그리움도 다 내려둔 채 힘차게 다음 걸음을 떼기 위한 필수 조건일지도 모른다. 후회에 잡히지 않고 앞으로 가기 위해서 먼저 충분히 사랑하는 일이 얼머나 중요한지, 그렇게 충분히 사랑한 사람이 어떤 미래에 닿는지, 정승환은 노래한다. 오늘의 이야기는 곧 다가올 봄, 녹아 사라질 몸을 하고도 영원할 사랑을 노래하던 사람이 사랑과 함께 도달하는 어떤 해피엔딩에 대한 이야기다.
멀리 배웅하던 길
여전히 나는 그곳에 서서
그대가 사랑한
이 계절의 오고 감을 봅니다
아무 노력 말아요
버거울 땐 언제든
나의 이름을 잊어요
꽃잎이 번지면
당신께도 새로운 봄이 오겠죠
시간이 걸려도
그대 반드시 행복해지세요
그 다음 말은 이젠
내가 해줄 수 없어서
마음속에만 둘게요
꽃잎이 번지면
그럼에도 새로운 봄이 오겠죠
한참이 걸려도
그대 반드시 행복해지세요
끝 눈이 와요
혹시 그대 보고 있나요
슬퍼지도록 시리던
우리의 그 계절이 가요
마지막으로 날
떠올려 준다면 안 되나요
다시 한 번 더 같은 마음이고 싶어
우릴 보내기 전에
몹시 사랑한 날들
영원히 나는 이 자리에서
따가운 햇살 쏟아지는 이 길엔
여전히 너의 향기가 남아있어
잊고 있던 오래된 약속처럼
지금 너에게 가고 있어
따분한 버스 창가에 걸터 앉아
멍하니 바라보았던 그 뒷모습
눈치 없는 친구의 장난에도
온통 너 밖에 안 보였어
늘 투덜대던
월요일 아침이 기다려져
너 하나로
한참을 웃음 짓다
혼자서 무너졌던
그 밤을 절대 넌 모를 거야
달리고 달렸던 그 여름의 로맨스
무심한 척 너에게 건넸던 내 마음
우산을 펼치며 날 보고 웃는 널
멍하니 난 바라보다
울음이 터질 뻔했어
늘 우연처럼
학교 앞 정류장에 먼저 가
널 기다려
매일 눈치만 보다
끝내 장난만 치다 삼킨 말
'널 좋아해'
달리고 달렸던 그 여름의 로맨스
저기 저 별들 사이 숨겨둔 내 마음
내 세상 내 소원은 전부 너였어
매일 난 널 떠올리면
사랑을 알 것 같았어
따가운 햇살 쏟아지는 이 길엔
여전히 너의 향기가 남아있어
어디선가 이 노랠 듣게 된다면
한 번쯤 웃으며 기억해줘
안녕 내 첫사랑 참 오래 걸렸어
어느새 널 추억이라 부를 만큼
지금쯤 그 꿈은 이루어졌을까
있잖아 정말 좋아했어
어디서든 잘 지내길
눈이 부시게
이젠 안녕
1. 사랑을 못 박는 겨울
〈눈사람〉의 그,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다 녹아 당신과 함께 갈 수 없는 새하얀 얼굴은 자신의 마음을 영영 새하얀 눈밭에 못 박는다. 이미 당신을 "멀리 배웅"하고 난 후에도 꼼짝 않고 그곳에 서서 "그대가 사랑한 이 계절의 오고 감"을 보고 있는 그. "나의 이름"도 잊어도 좋다 말하며, 당신께 올 "새로운 봄"에 바라는 일이라고는 "반드시 행복"해지는 일뿐이다. 자신이 손 닿을 수 없는 계절을 향하는 당신에게, "끝 눈" 속에서 겨우 말하는 것이라고는 "마지막으로 날 떠올려" 주는 일 하나. "우릴 보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같은 마음이 되고 싶다는 소원은 애절한 목소리와 다르게 아주 찰나에 이루어지고 사라질 것에 불과하다. 그 찰나로 "영원히 나는 이 자리에서" 살겠다는 그는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랑을 쏟아 당신에게 내민 것만 같다.
영원히 녹지 않을 겨울에 스스로 못을 박고 사랑한 날들을 헤아리는 데 평생을 바치겠다는 결의는 눈사람의 심지처럼 굳는다. 아주 단단한 얼음 못처럼. 영원히 슬프더라도 그것을 감수하며 사랑하겠다는 마음은 최선의 최선이자 있는 모든 사랑을 그러모아 빚은 결정체다. 그걸 품은 채로 어떤 전설 속의 주인공처럼 그는 한없이 슬프게 겨울에 살게 될까. 그러나 영원히 한 계절에 살 수는 없다. 마음은 영영 그 겨울을 헤매더라도 몸이 놓인 곳의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뀐다. 몇 번이고 계절이 돌고 돌면 기어코 그에게도 여름이 온다. 이제는 그가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행복"해질 차례다.
2. 얼음 못이 녹는 여름
여름이 온다. 〈에필로그〉의 계절은 "따가운 햇살 쏟아지는" 여름이다. 〈눈사람〉에서는 어떤 사랑을 했는지 말하지 않고 헤어진 후에도 심지에 박혀 남아 있던 사랑에 대해 토로했다면, 〈에필로그〉에서는 그토록 사랑하던 당신과의 어떤 여름이 흘러나온다. 그는 겨울을 사랑했던 당신과 여름도 보낸 적이 있었다. 마음을 눈사람처럼 얼려 그 가운데 얼음 못을 박고 겨울에서 꼼짝 않을 때는 떠올릴 수도 없던 그 계절의 기억이, 여름이 이르자 물밀 듯 쏟아져 나온다. "따분한 버스 창가에 걸터 앉아 멍하니 바라보았던 그 뒷모습"도, "월요일 아침"마저 기다리게 하던 얼굴도, 당신을 향해 "달리고 달렸던 그 여름의 로맨스"가 "우산을 펼치고 날 보고 웃는" 모습이.
그제야 당신이 사랑하던 겨울이 녹고 여름이 왔음에도, "따가운 햇살 쏟아지는 이 길"에 "여전히 너의 향기가 남아있"음을 알아채게 된다. 영원히 함께 했던 시절에 살지 못해도, 평생을 함께 살아가지 못해도, 다시 볼 수 없더라도, 그럼에도 우리의 사랑은 빛나며, 그것은 나를 밝게 비춘다는 것을 배운다. 녹아내린 마음에도 사랑은 여전히 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만 같은 마음"이고 싶다던 눈물 섞인 애원은 "한 번쯤 웃으며 기억해" 달라는 화창한 안부로 변한다. "정말 좋아했"다는 말을 하면서도 울지 않고 이 여름처럼 환할 당신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이젠 안녕", 그렇게 인사하는 목소리는 이제 더는 슬픔에 젖어 녹아가거나, 영영 한 계절에 스스로 가두는 눈물이 아니다. 정말로 "눈이 부시게" 인사한다. 앞으로도 종종 떠올리며 웃게 될 내 첫사랑, 그만큼 빛나는 계절을 주었던 너를 슬픔에 가두는 일로부터는, 우리가 헤어진 겨울을 헤매는 일에서는, "이젠 안녕"
이제 눈사람의 시간이 여름 너머로도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