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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틀비와 함께 May 12. 2024

자갈길은 나의 힘-울프

불친절한 은둔자의 방 

   나이가 들면서 새삼 다시 읽고 매력에 빠진 작가가 있다. 바로 버지니아 울프(Virgina Woolf)다. 그녀의 작품을 읽다가 만나게 되는 그녀의 표현력, 스토리 전개 방식, 그리고 번뜩이는 주제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온다. 내가 타로카드 영혼의 숫자를 알게 된 후, 제일 먼저 찾아본 사람의 생일이 바로 울프였다. 그녀는 1882년 1월 25일에 태어났고, 영혼의 숫자는 바로 9번 은둔자이다. 왠지 모를 내적 친밀감을 느꼈던 울프가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은근히 좋았고, 정말 은둔자가 나온 게 신기하기도 했다. 

   내가 만약에 버지니아 울프에게 타로카드 체크 리스트를 읽어준다면 그녀는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상상만으로도 떨렸다. 은둔자의 특징은 주류 사회의 가치와 정의에 의심하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울프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철학과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다. 특히, 당시 영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고민했던 작가다. 그녀의 고민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이 바로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1929(1981))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산책 도중 사색에 잠겼다가 무심결에 대학교의 잔디밭에 들어간 경험을 소개하면서, 여성에게 왜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이 중요한지를 설명한다.     

"그 남자는 공포와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간 이성보다는 본능적인 깨달음이 도움이 되었다. 그는 학교 관리원이었다. 나는 여성이었고, 여기는 잔디밭이고 길은 저쪽이었다. 연구 교수와 학자들만이 여기를 지날 수 있고, 내게 허용된 길은 자갈길이었다." (A Room of One’s Own, 5) 


사회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경계선 밖으로 끊임없이 밀쳐졌던 울프는 자신의 위치가 정확히 자갈길이었음을 자각한다. 그녀는 낙담하기보다는 내가 왜 잔디밭이 아닌 자갈길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은둔자답다. 기형도 시인이 “질투는 나의 힘”을 외치듯, 그녀는 “자갈길은 나의 힘”을 외친다.        


“여성이 처한 어려움이란 자신 앞에 아무런 전통이 없다는, 혹은 그 전통이란 것이 너무나 짧고 파편적이어서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A Room of One’s Own, 69)      


울프가 발견한 자갈길의 문제는 여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여성이 스스로 그 본질을 논의하고 표현하지 않아 만들어진 울퉁불퉁함이었다. 울퉁불퉁한 자갈길은 구두를 신은 여성에게는 걷기 힘든 길이지만, 그렇다고 걷지 못할 길도 아니었다. 그녀는 차라리 구두를 벗어던지고 계속 그 자갈길을 걸으라고 한다. 그 울퉁불퉁한 자갈 하나하나가 오히려 깨끗하게 손질된 잔디밭보다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나는 자신에게 다른 무엇이 되는 것보다 간단하고도 그저 평범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A Room of One’s Own, 100)      


울프는 여성이 자신을 찾는 좋은 방법으로 직업을 얻고,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직업이 여성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며, 자신의 능력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고 보았다. 특히 그녀는 여성에 관한 소설을 많이 쓰고, 다른 여성과 경험을 공유하면서 여성의 본질을 여성들이 스스로 쌓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작가의 일은 하늘에서 준 재능, 즉 천재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지만, 그녀는 모두 글을 쓸 수 있으며, 써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주장은 당시 작가를 성역으로 만들고 여성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 사회를 비판하면서, 여성 자신의 자각을 촉구한 것이다.      


내가 울프에게 은둔자 체크 리스트를 읊는다면 “왜 이런 걸?” 하면서 그녀는 갸우뚱할 것이다. 다만, 내가 “이 인터뷰를 바탕으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녀는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 주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공유해 줄 것이다. 그녀는 우리가 글쓰기의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여러 방식으로 우리를 표현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할 것이다. 


<에움길(굽은 길)>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한국의 박경리 작가와 박완서 작가가 떠오른다. 한국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누구보다 잘 표현한 두 작가는 바로 울프가 말한 여성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본질을 함께 공유하는 전통을 세운 인물들이다. 울프가 자갈길에 서 있었다면, 이들은 에움길에 서서 한국의 문학 전통을 세운 작가들로서.       

“아직도 비록 신분증은 못 얻어 가졌지만 ‘나는 소설가다’라는 자각 하나로 제아무리 강한 세도가나 내로라하는 잘난 사람 앞에서도 힘 안 들이고 기죽을 거 없이 당당할 수 있고, 제아무리 보잘것없는 밑바닥 못난이들하고 어울려도 내가 한 치도 더 잘난 거 없으니 이 아니 유쾌한가.” (『우리 시대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 46)         

‘나는 소설가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 어디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박완서 작가의 여유와 자신감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이뤄졌을지 가늠하기도 힘들다.      


울프와 박완서가 차를 마시며 여성의 삶을, 소설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한글과 영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들이 서로 오고 갈 것이라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일요일... 편한 시간에 가장 기쁜 상상을 해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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