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올바른 교육, 공부 방법
제가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북미에서 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한 이유 중 하나가 아이를 느리게 키우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 중 하나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라는 말이 저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제 어릴 적 기억이 상당히 미화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 어렸을 때의 행동과, 말, 능력 역시 상당히 미화되어서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학교에서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가르치다 보니, 아이들이 많이 어림에도 불구하고 제 아이들을 가르칠 때 - 바보 같게도 - 그렇게 다 큰 학생들과 제 아이들을 저도 모르게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너무 높은 잣대를 대고 아이들을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분명 저에게 칭찬을 듣고 싶을 텐데, 제 높아진 눈높이는 아이들의 단점만 지적하고 칭찬에 인색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아이는 느리게 키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속도라는 것이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저는 각 아이의 성장 속도에 맞추어 키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한국의 교육은 아이의 속도가 아니라, 어른의 속도에 맞추어져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어른이 보기에 내 아이가 옆집의 아이보다, 내 아이의 친구보다 공부를 더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자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먼저 배우게 하고 더 많이 배우게 해서 더 잘하게 하고 싶은 부모의 '욕심의 속도'에 아이들의 교육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심은 단지 아이가 어릴 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어 보였습니다.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교수님들의 고충을 들어보면, 대학교 1학년 수강신청에 학생들이 안 들어오고 학부모님들이 대신 들어와서 질문도 하고 또 수강신청을 대신하는 폐단이 있어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신입생과 학부모 따로 나누어서 두번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학기말이 끝나면 성적정정신청이나 의의신청을 부모님이 하셔서 이에 응대를 하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라고들 하셨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는 상상도 못 한 일이라 깜짝 놀라서 그것이 정말 사실이냐고 몇 번을 여쭈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아이의 일을 부모가 대신해 주면 아이는 자신의 속도에 맞춘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한국의 교육 속에서 아이들이 정말 '공부'를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학원에서 미적분을 배워서 문제를 푸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 부모님의 말을 빌자면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그 아이는 정말 미적분을 이해하는 것일까요? 그 아이는 정말 미적분을 공부하는 것일까요? 그 아이는 나중에 커서 미적분을 고등학교 때 배운 사람보다 더 잘 사용할 수 있을까요? 만약 아이가 미적분을 이해할 수도, 공부할 수도 없고 누군가의 지도하에 빨리 잘 푸는 '기술'만을 배우는 것이라면, 그리고 단지 남보다 어떤 지점에 먼저 가서 반복학습을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미적분을 미리 배우는 것은 '공부' 또는 '학습'이라는 관점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빨리' 배우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대다수의 아이에게는 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 특히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점에서요. 단순히 계산을 빠르고 정확하게 하는 것이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라면, 인간은 절대로 컴퓨터를 이길 수 없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인공지능을 비롯한 컴퓨터가 사람보다 더 잘만한 일인데, 그런 일을 왜 그렇게 먼저 배워야 하는지조차 이해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저는 학교를 다닐 때, 정말 수학을 잘했습니다. 단 한 번도 과외를 받거나 따로 배운 적도 없고, 고등학교 수학시간엔 따분해서 자습만 했고, 문제집도 딱 두권만 풀었습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6년 동안 50%의 시험을 만점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학을 공부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수학을 잘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신가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제 수학공부의 비밀을 여러분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그랬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 초, 중학생 때 모든 수학의 '정리'를 책을 안 보고 제가 혼자서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았습니다. 왜 이등변 삼각형의 밑변의 각이 같은지도 정리해 보았고,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혼자서 다시 증명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혼자만의 노력이 제 뇌를 '수학적'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주 조금씩이겠지만, 그 몇 년의 시간 동안 제 뇌가 수학적으로 변하고 나서는 그냥 수학이 쉬워져 버렸습니다. 거의 모든 수학이 큰 어려움 없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수학을 이해했기 때문에 암기할 필요도 없었고, 많은 문제집을 풀 필요도 없었습니다. 네 저는 수학을 외우는 대신에, 수학을 어떻게 공부하고 이해하는지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방법을 발견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눈치를 채셨겠지만, 전 공부란 자기 스스로 집중하는 방법과 공부하는 방법을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외우는 것은 두뇌를 사용하는데 도움이 되고, 또한 기본적인 지식을 암기하는 것은 분별력을 키우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지만, 이미 모든 지식이 인터넷에 다 나와 있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한 제 전공분야도 인터넷을 찾아보고 배울 때가 참 많습니다) 굳이 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외우는 것이 공부의 본질이 절대 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오히려 저는 공부는 자신이 어떤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장점을 어떻게 개발시키고 그 단점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아내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그것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아이가 시간을 갖고, 자신의 시간에 맞게 찾아낼 수 있는 기회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의 몫은 옆에서 힘을 북돋아주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격려를 해주면서,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주는 것이고요. 하지만 지금처럼 선행학습 위주의 공부를 하게 되면, 아이는 공부를 할 기회와 시간도 없이 어른들의 빠른 발걸음에 쫓겨서 망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강요(?)에 의해서 아이는 평생 공부하는 방법을 익힐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죠.
또 하나의 불만은 제가 배웠던 한국의 교육은 모든 아이를 하나의 상자에 맞게 재단하려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국어시간에 시를 배운다면 저희는 참고서에 나온 그대로 그리고 선생님이 가르치신 그대로 시를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라는 것은 읽는 사람마다 다른 곳에서 감동을 느끼고,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미학이 아닌가요? 제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국어나 도덕과목에서 왜 모든 학생이 동일한 생각과 동일한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왜 교과서에서 말하는 정답은 하나밖에 없는지, 그리고 개인의 생각의 차이는 무시당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이해나 진실의 범위가 아닌, 정답을 외우고 억지로 암기하게 하는 교육은 개인과 사회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러한 배움의 과정은 무시한 채, 등수만을 위한 교육을 한다면, 절대 올바른 교육이, 사회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는 것보다 공부를 '왜' 하느냐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질문에 답은 각자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왜' 공부하는지를 알면 아이들은 더욱더 쉽게 교육의 목표에 다가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각 교과목마다 고유한 목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예를 든 수학의 교육 목적은 '논리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세부 목적 위에 모든 목적들을 모두 포괄한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그 답은 공자가 자신의 제자 자로에게 했던 말에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자님은 자로에게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자신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공부는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그리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데서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아성찰이 되어 있지 않으면 어느 순간 앞으로 나아가기가 참 힘이 듭니다. 대학에서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좌절감을 느낄 때가 학생이 A도 알고 B도 안다고 하는데, AB를 합칠 수 없는 것을 볼 때였습니다. 그래서 A와 B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 표면은 알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몰라서 없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마치 4층 건물의 지붕은 만들어져 있지만, 1층부터 4층까지 건물의 벽도 창도, 계단도 없는 그런 건물을 보는 듯한 망연자실함을 느낄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대학원생에게 중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가르칠 시간도 여력도 없는 교수의 입장에서는 매우 난감합니다. 아마 그 학생들도 자신이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서 건물을 지을 시간이 없이 누군가가 억지로 1층으로 올려주고, 다시 2층을 올라가는 사다리를 갔다 주어서 4층까지 올라간 것이겠지요?
그래서 전 아이들에게 제 교육의 목표만 알려주고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초등학교는 열심히 하는 것을 배우자고 했습니다 (열심히 놀고 집중해서 공부하고, 놀 때는 놀고 공부할 때는 공부하고). 많이 놀아서 마음의 넓이를 넓힐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중학교는 기초를 다지고 자신이 가장 잘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시기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는 자신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공부의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점점 배울 것은 많아지는데,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 방법을 찾아야 앞으로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대신, 저는 제가 못했던 것만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제가 못하기 때문에 제 포용력이 커질 수 있었고, 제가 못했기에 기다려 줄 수 있는 그런 것들만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제가 자전거를 못 탔었기 때문에, 아이가 두발자전을 탈 수 있을 때까지 몇 년을 기다려 주었고, 제가 야구를 못했기에 아이와 캐치볼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1미터를 던져도 칭찬할 수 있었고, 아이가 굴러가는 공을 잡지 못해도 같이 웃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스스로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아빠가 자신의 실수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도 쌓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아빠가 자신의 발전하는 모습에 기뻐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10년이 지나고 나서는 아이는 스스로 공을 던지고 받는 방법을 터득하고 친구들에게도 기쁜 마음으로 가르쳐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느리게 키우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제가 아이를 안고 뛰는 대신에, 아이의 작은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한번 빨리 감기를 시작하면, 아이를 안고 쉽게 훌쩍 뛰어 넘겨주면, 익숙해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선택이 옳은 것인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공부하란 말을 안 해도 자신의 공부는 알아서 하고, 독립적으로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 제 선택이 잘못되지는 않은 것 같아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