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관과 가치관
아이들이 어려서 살던 동네에는 참 좋은 분들이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고 좋은 기억을 많이 쌓을 수 있었죠. 특히 제 아래층에 살던 이웃은 저희와 나이도 비슷하고, 부모 중 한 분은 저와 같은 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의 나이도 같아서 많은 교류가 있었습니다. 부부 두 분이 모두 선하시고 따뜻한 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성품보다, 자녀에 대한 교육관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들이 많이 생기더군요. 저희 부부의 경우는 아이를 엄하게 키우는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잘한 것은 칭찬을 그리고 못한 것은 꾸중으로 훈육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제 이웃 분들은 아이는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하고 혼을 내면 기가 죽기 때문에 아이를 절대로 혼내지 않아야 한다는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작은 곳에서 사소한 문제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한 번은 그 집의 부모 중 한 명은 운전면허를 자격을 상실하게 되어서 아이를 학교에 데리러 올 수가 없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제 큰 아이와 그 집 큰아이가 같은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그동안 집사람이 저희 큰 딸을 학교에서 데리고 올 때, 그 집 아들도 같이 데리고 오기로 했습니다. 저는 사고가 날 때의 문제를 생각해서, 그리고 집사람이 도와주지 않아도 집에 올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있었기에, 집사람이 도와주는 것에 반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희 아이를 데리고 오는데 한 명을 더 데리고 오면 되는 것이니 그냥 하겠다고 하는 집사람의 말에 설득을 당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 동안은 별문제가 없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서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집사람이 학교로 아이들을 데리러 갔는데, 그 집 아이가 학생의 하교를 도와주는 선생님에게 자기는 모르는 사람인데 자기를 차에 태우려 한다고, 아이 유괴범 취급을 한 것이었죠. 제 아이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선생님도 그 아이가 여러 번 저희 차에 타는 것을 보았기에 유괴범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아이가 승차를 거부했기에 그 아이를 데리고 올 수가 없었습니다. 집사람은 아이를 기다리는 그 집 부모에게는 아이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왜 데리고 올 수 없었는지 설명을 해 주었고, 그 집 부모는 무면허로 운전을 해서 아이를 학교에서 데리고 왔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맹랑하다고 생각이 들었고, 집사람의 선행이 무시당했다고 느껴졌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 집 부모가 그 아이를 집사람에게 데리고 와서 사과를 시킬 것이라고 생각했고, 부모도 저희에게 사과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희에게 돌아온 말은 앞으로 운전을 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아이가 삐졌었던 것 같다는 부모의 웃음이 전부였습니다. 또 한 번은 그 집의 아들과 제 큰딸이 놀고 온 후, 제 딸이 저에게 그 집 아이가 자기를 구석으로 데려가서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고 만져보겠냐고 물어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겐 대수롭지 않게 그랬냐고 얘기를 하고, 그 아이의 아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웃으면서 알았다고 하고, 그 후에도 아무 일 없이 행동하는 그 이웃을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너무 착한 사람인 들인 건 알겠지만, 계속해서 이런 일들로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쪽은 아무렇지 않은데 이러한 일들로 저희 부부는 점점 더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이 선한 사람들인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희가 이상한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들고 더 스트레스를 받게 되더군요. 결국 점점 더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이사를 하고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집도 아이는 절대로 혼내지 않는 집이었는데, 그 집 아이와 제 아이가 놀다가 다툼이 있으면, 저만 제 아이에게 양보를 하라고 말하고, 다투는 것에 혼을 내다보니 점차 그 집을 멀리하게 되더군요. 어느 부모도 자신의 아이를 혼내는 것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른 집의 아이를 혼내는 것은 더 눈치를 보게 되는데, 자신의 아이만을 혼내게 되면 아이들 사이에서도 제 아이가 약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경 쓸 것이 많게 되더군요.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는 옛말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점차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서 아이가 생기면서 오히려 인간관계의 폭이 줄어들고 좀 더 특정한 사람들만 만나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는 집을 만나게 되고, 어르신들만 사시는 집과는 멀어지는 것 같은 것이죠. 연세가 드신 분들이 계시는 집에 아이를 데리고 가면 아무래도 불편해하시더라고요).
외국에서 생활을 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 인간관계가 정형화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는 불편한 점이 있어도 조금씩 맞추어 가면서 인간관계를 했는데,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편한 관계를 더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 옳고 그름에 대해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육아에 대해 어느 정도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서로 미안한 일을 사과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을 만나는 것을 선호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는 별것 아닌 이 세 가지 조건조차도 제 인간관계의 폭을 많이 좁게 만드는 것을 보면 육아라는 것이 단순히 아이를 먹이고 입히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깊게 느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