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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퇴사, 삶의 의미를 잃다.


대기업 입사 후 회사생활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대기업 계열사지만 생긴 지 얼마 안 된 회사다 보니 총인원이 20명 내외였다. 시스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재고 100개 중 1개가 출고되면 99개로 되어야 하지만 프로그램은 100개로 남아있었고 엑셀 수기로 재고를 별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담당자가 숫자 하나만 잘못 눌러도 재고가 틀어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재고조사를 했을 때 실물과 전산의 재고차이가 많이 났다. 그리고 회사로 왕복에 걸리는 시간은 약 2시간 40~50분이었다. 모든 상황이 힘들었지만 나를 뽑아준 회사이기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뒤집은 건 '몇몇의 회사사람'이었다.



A 상사는 나와 전 회사가 같았다. 출신이 같다는 이유로 나를 챙겨주었다. 밥과 커피를 자주 사주었고 무엇보다 내가 성실해 보인다는 이유로 나를 좋아했다. 나는 회사 시스템이 문제지만 A 상사를 믿고 같이 개선해 나가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일했다. 하지만 얼마 후 A 상사가 나의 메일을 스크린샷으로 찍어서 다른 사람에게 메신저로 공유 한 뒤 '헐 ㅋㅋㅋ'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를 조용히 불러 "내가 경력사원에게 말해주긴 좀 그런데.. 그 메일 내용에 있는 회의 시간 대표님이랑 이야기한 거예요?"라고 물었다. 나는 대표님이 화요일에 시간이 괜찮다고 해서 다른 참석자들에게 오후 2시가 괜찮은지 물어본 상황이었고 다른 참석자들이 가능하다고 하자 대표님에게 오후 2시에 회의를 하겠다고 메일을 보낸 상황이었다고 답변했다. A 상사는 대표님한테 오후 2시가 가능한 지 컨펌받고 최종 확정 메일을 보내야죠라고 하면서 다음부터는 주의하라고 했다. A 상사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대표님한테는 최종 확정된 것만 공유하라는 입장이었는데 회사가 보수적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연말을 기념하여 동료를 추천하는 이벤트가 있었다. 1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를 챙겨준 A 상사를 긴 글의 칭찬으로 인사팀에 제보하였다. A 상사는 내가 제보한 글로 '소통상'을 받았는데 상장과 함께 상품권을 받았다. 나는 카톡으로 축하드리면서 넌지시 제가 감사해서 추천글을 썼다고 말했다. A 상사는 몰랐다며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A 상사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울증이 심하면 아침에 회사에 가기 힘들 정도로 뒤척이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당일 아침 오전에 반차를 쓰겠다고 했다. 그리고 오후에 출근했다. 며칠 후 아침에 또다시 그런 증세가 있자 나는 당일 아침에 회사에서 분기별로 주어지는 연차를 쓰겠다고 했다. 하지만 A 상사는 업무 관련된 사례에만 쓸 수 있고 당일 아침에는 쓸 수 없으니 출근하라고 했다. (나는 그날 쉬어도 업무적으로 이상이 없다고 생각했고 분기별로 주어지는 연차의 경우 사람들이 개인적인 사유로 쓰는 것을 봐왔었다.) 그 사람이 나오라고 하니 나는 나에게 남은 정식 휴가인 오전반반차를 쓰고 출근했다. A 상사는 화가 났는지 나를 보지도 않은 채 "왔어요?" 하며 일했다. 그리고 종종 나를 따로 불러 잘못을 할 때마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왜 이렇게 했느냐며 꾸짖었고 나는 다음부터는 잘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던 중 나를 힘들게 한 B 상사가 있었다. 그는 회사의 돈을 관리하는 회계팀장이었다. 내가 구매를 할 때면 한 번에 승인해 주는 적 없이 매번 태클을 걸어댔다. 기존 업계에서 발주를 내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생산 시 로스율을 따져보라는 등 말도 안 되는 사유를 들며 기안을 거절했다. 나는 새로운 회사에 맞게 적응해보려 했지만 매번 나의 기안을 다시 써오라는 B 상사를 보고 굉장히 분노했다.



시스템도 문제이지만 몇몇 사람들이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우울증이 심해지자 하루하루 출근하기가 힘들었다. '아내가 옆에서 많이 도와주었고 스스로 노력해서 어떻게 여기까지 회복해 왔는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점차 안 좋은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더 심해지기 전에 퇴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아내에게 퇴사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아내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퇴사하면 우리 집 경제는 어떻게 할 예정이냐고 물었다. 나는 전 회사를 그만두면서 받은 퇴직금도 있고 모아둔 돈도 있기 때문에 지금 퇴직하고 아무 수입이 없더라도 6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아내는 내가 다시 퇴사한다는 말을 듣고 많이 실망하였다. 그리곤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남편이 회사를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내게 전화를 걸어 지금 회사 나오면 정말 낙오자 된다. 나오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살아야겠는데, 내가 죽겠는데 왜 다들 주변에서 안된다고만 하는 걸까. 나는 삶의 의미를 잃었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퇴사는 하고 내 삶을 결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회사에 가서 2주 뒤에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회사에 다닌 지 1달 반정도 되는 시점이었고 인수인계도 이상 없이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회사 내에 내가 그만둔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며칠 후 C 상사가 와서 내게 문서작업을 빠르게 해달라고 했다. 나는 다른 업무를 제쳐두고 그 업무를 해서 C 상사에게 메일로 드렸다. 그런데 C 상사가 갑자기 내 자리로 와서는 "이걸 나보고 다 계산하라는 거예요?" 라며 언짢은 말투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다시 하라며 다른 사람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기분 나쁘게 이야기했다. (C상사는 다른 팀원이 퇴사할 때 어떤 업무 했는지 카톡 내용을 보여달라고 했으며 컴퓨터를 켜지도 말라고 하며 물류센터로 일을 보낸 이력이 었었다.) C상사가 그렇게 말하자 나도 화가 나서 "다른 업무 다 제쳐두고 문서작업 해서 준 건데 왜 그렇게 말씀하시냐. 그리고 직접 계산하라는 의도로 보낸 적 없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C 상사는 이럴 거면 이 자료로 회의하지 말자고 했고 나도 회의를 하지 말자고 했다. 그러자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A 상사가 하는 말이 "C 상사가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왜 그러시냐"라고 하자 나는 분개했다. A상사는 내가 보낸 메일도 보지 않고 C 상사 편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오후 6시가 되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사를 나왔다. 그렇게 주말을 우울감과 분노로 휩싸인 채 보냈고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다음 주 월요일 나는 더 이상 일을 못하겠다는 생각에 인사팀에 당일 퇴사가 가능한지 물었다. 인사팀에서는 가능하다고 하였고 나는 A 상사에게 잠시 미팅이 가능한 지 물었다. 그러자 A 상사는 자기 바쁜 거 안 보이냐며 미팅을 거절했다. 나는 인사팀에 다 확인했고 오늘 회사를 그만두고자 한다며 이따 시간 될 때 말씀 달라고 했다. 그러자 A 상사는 바로 나를 회의실로 부르더니 "왜 당신은 제 멋대로 행동해요? 내가 휴가 쓸 수 있게 편의도 다 봐줬는데."로 말을 시작했다. '내가 제멋대로 행동한다고? 그리고 내 휴가는 내가 결정하는 거지. 편의를 봐줬다고?'라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나는 A 상사가 앞과 뒤가 굉장히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리에서 나도 지지 않았다. "당신, 이미지 관리하려고 앞과 뒤 다르게 행동하는 거 다 안다. 그러지 말아라."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A 상사는 "내 주위 사람은 그런 말 한적 없다. 왜 그렇게 보느냐"라고 이야기하더니 갑자기 "나도 사실 이 회사 퇴사하려고 한다. 알아보고 있는 회사가 있는데 혹시 나중에 기회 되면 당신도 같이 데려가려고 하는데 연락해도 되느냐"라고 물었다. 나는 황당했다. 그리고 이런 정신 나간 놈이 다 있나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혹시나 업무적으로 물어볼 게 있으면 연락을 하라고 했고 퇴직서에 서명을 받아 그날 퇴사를 했다.



그런데 퇴사한 날 밤 11시 30분. 카톡 하나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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