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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Oct 12. 2024

휘발되지 않기 위해

기대어 버티기


지난 화요일 저녁부터 몸 상태가 꾸준히 좋지 않았다. 나름 건강하다고 자부했던 몸이었는데 20대 후반이 되면서 말썽이 점차 늘어난다. 이래서 다들 30대에 건강 챙기려고 하는 건가 싶었다. 치통으로 시작한 내 예민함은 결국 낮아진 면역력과 맞물려 감기인지 코로나인지 모를 고열을 낳았다. 우울증인 룸메를 위해 그리고 나의 원활한 요리생활을 위해 이전부터 도모했던 에어프라이기를 사기 위해서였는데. 생각보다 무거운 애를 합정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많은 인파를 헤치고 버스로 옮겨 집에 도착하기까지 부러 따라 와 준 룸메를 위해 대부분을 내가 이고 왔었다. 사실 그땐 힘든 것도 몰랐던 게 뭐든 함께 하면 많이 나아질 것 같다는 너의 이야기와 상담 선생님께서 요리를 추천했다는 소리에 더는 고민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중에 당근을 찾아보니 비슷한 오븐형 에어프라이기가 2만원대에 올라온 것도 봤지만 베이킹 도구들까지 싸그리 넣어 주셨으니 오히려 돈 번 셈 치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튼 돌아와서, 나도 모르는 사이 무리했던 건지 그날 저녁 잠들기 전부터 목구멍이 까끌하더니 침을 삼키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고 집에 있던 프로폴리스를 아무리 뿌려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회사에 출근하고서는 한쪽 콧구멍으로 물처럼 주르륵 흘러나오는 코를 연신 닦아내며 일을 했는데 처음엔 비염인 줄 알았다. 워낙에 환절기에 비염 증상이 심하기도 하고, 한 번 잘못 걸리면 그 정도로 콧물을 물처럼 쏟아냈기에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공교롭게도 주말에 친구들과의 약속 그리고 한강 수영 대회를 앞두고 있었는데 당장 약속 전날인 금요일, 아침부터 열이 너무 많이 나 없던 연차를 털어 썼을 정도로 몸이 기진맥진했다. 결국 친구들과의 약속을 취소하고 대회는 전날 컨디션을 한 번 보자고 마음 먹었다. 29살, 30이 되기 전 나에게 무엇인가 큰 터닝포인트를 주고 싶었다. 바다든 강이든 맑지 않은 물에 들어가는 걸 꺼려하지만 물을 좋아하기도 해 수영을 배우고 있는데 최근 몸이 계속 좋지 않아 한 달 가량을 쉬었다. 그러다 딱 이번 주 초부터 다시 나가기 시작했는데 같이 수영하던 언니가 대회 일정을 알려온 것이었다. 하고 싶은 마음이 큰데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냥 질러본 거였다. 20대의 끝에 큰 성취감을 하나 남기고 싶었던 모양이지.


하지만 몸이 말처럼 따라주지 않을까 걱정이 컸다. 머리가 띵한 고열에 신음하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니 룸메가 손수건에 물을 적셔와 몸 여기저기를 닦아 주었다. 살갗에 드는 차가운 공기에 서늘함이 기분 좋다고 느끼다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2시까지 내리 잠만 잔 우리는 몸을 일으켜 냉동 볶음밥을 데워 먹었고, 4시경 어렵게 잡은 치과 예약을 더이상 미룰 수는 없어 결국 증상을 말하고 내원했다. 다행히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간단한 치료만 받고 나올 수 있었고 다시금 오르는 열감을 느끼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리자마자 빨간 불에 길을 건너는 맹인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가는 목적지를 함께 해 주고, 택시를 기다려 주는데 미안하셨는지 연신 말을 붙이셨다. 그렇지 않겠어요? 라는 말끝마다 붙는 습관을 캐치해 가며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차들의 번호판을 확인했다. 말을 붙이던 아저씨는 주머니에 있던 약과를 건네셨다. 사실 단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괜찮다고 했는데 결국 손에 쥐어주셨다. 회사에서도 시각장애인분들을 만나지만 아저씨의 말투는 뭐랄까... 묘하게 까끌거렸다. 친절하지만 어딘가 날이 서 있다고 느꼈지만 이내  그 마음도 거두었다. 타인을 내 스스로 정의하고 편견으로 바라본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타500까지 들려 주셔서 감사히 받았다. 사실 그냥 버리는 게 나으려나 라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삐쭉 내밀었다. 철저히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에게 간식을 받는다는 게 조금 께름칙했다. 난 언제부터 이렇게 각박한 세상에 살게 되었나,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나에게 회의감이 느끼며 결국은 집으로 갖고 왔다. 


룸메는 동생 졸업 연주회가 있어서 본가로 떠났고 차라리 감기든 코로나든 옮길 수 있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아픈데 혼자 두고 가는 게 미안하다며 몇 번이고 마음을 쓰는 게 미안하면서 감사했다. 간만에 혼자인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됐다. 난 혼자가 되기 전에는 닥쳐올 외로움과 불안을 느낀다. 둘이라서 할 수 있었던 것들을 그리워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그럼에도 막상 혼자가 되면 권태로움을 즐기는 게 참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날 아침 다섯 시가 되도록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유튜브로 시간을 보냈다. 도통 오지 않는 잠에 지루함을 느끼다 책을 떠올렸다. 책을 보면 잠에 들겠지, 라는 마음에 룸메가 알라딘에 팔겠다고 내놓은 책들 중 손에 잡히는 대로 갖고 와 침대에 누웠다. 정신병원, 우울, 공황에 대한 경험담을 담은 에세이였다. 담담하지만 실감나게 적은 글이 눈에 날아와 꽂혔다. 30분쯤 지났을까. 더이상 한계인지 급격한 피로가 몰려와 결국 한겨울에도 틀지 않던 장판을 켜고 몸을 뉘였다. 그리고 세 시간 정도 지난 뒤 옆집의 공사 소리에 눈을 떴다. 아득해진 정신과 함께 울리는 주인집의 전화벨에 결국 몸을 일으켰다. 기왕에 일찍 깬 정신에 어제처럼 SNS 에 뇌를 또 튀겼다간 정말 멍청이가 되겠다는 생각에 읽다 만 책을 읽기 시작했고, 책은 생각보다 쑥쑥 읽혀 3시간 만에 완독을 할 수 있었다. 책을 읽고 무언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껴 이 글을 적자고 앉았던 건데. 밥을 데우고 약을 먹으면서 역시 일부는 휘발되었다. 나는 내가 평소에 느끼는 마음, 감성, 생각들을 보통 마음으로 일기를 적는다고 여긴다. 문득 빨래를 널면서 그 일기들이 휘발되지 않는다면 글을 적는 게 어렵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다 모아서 하나의 책을 엮으면 언제든 내 생각을 들여다보는 일기장이 되려나, 라는 시덥잖은 생각도 하면서. 


확실히 잠을 충분히 자고 긴장을 놓으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말고 이어플러그를 뚫고 들어온 ABBA 의 댄싱퀸에 잠시 바깥에 시선을 돌렸다. 뭐랄까, 무료함 속에 발견한 횡재 같은 순간이었다. 후크가 끝나고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동영상으로 녹화했지만 더는 노래가 들려오지 않았다. 난 항상 담고 싶은 순간을 느끼느라 한 발 늦게 기록을 하는데 그 마저도 너무 나다워서 아쉽고 재미있다. 그래서 내가 사진과 영상을 사랑하는 거겠지. 이 마저도 떠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커서일까. 순간의 영원은 없으니 말이다. 원래는 하루종일 집에 틀어박혀 밀린 잠을 보충하고 책을 읽을까 하다가 읽은 책의 서점을 찾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합정 근처에 작업하기 좋은 카페를 찾아가 남은 작업도 좀 하고 말이다. 내 몸이 끝없이 지쳐버린 건 미루어 놓은 숙제 같은 포트폴리오를 거의 두 달 내내 붙잡고 있음이라는 걸 안다. 압박감과 긴장은 나한테 더할 나위 없는 죄책감이다. 하루를 멀끔히 잘 보내도 미루어 둔 숙제가 남은 것처럼 찝찝하다. 그 찝찝함에 삼켜진 지 두 달째다. 이직을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점점 덧없음을 느끼고 있다. 이직을 하면 뭘 하나. 내년에 워홀 나갈 건데. 그냥 남들처럼 안주하며 살까. 변덕이 국수물 끓듯 넘쳤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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