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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를 Oct 30. 2024

행동으로 실천하다

나의 책임을 모른 척 하련다.

8시 아기가 일어나서 안방과 현관문 앞에 있는 끝 방을 오갔다. 다다다다. 작은 발로 집안 구석구석을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누워서 “아기 밥 주고 어린이집 보내”라고 소리쳤지만 어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전 날 마신 맥주의 기운을 누르고 몸을 일으켜 끝방으로 갔다. 문을 열자마자 술에 절은 냄새가 풍겨왔다. 냄새를 맡자마자 짜증이 솟구쳤지만 그 짜증을 삼키고 다시 한번 말했다.


“아기 밥 먹이고 어린이집에 보내.” 안방으로 가 침대에 누웠지만 신경은 곤두섰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

다시 한번 끝방으로 가 같은 말은 반복했다. 이번엔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


“하.”

내가 쉰 한숨이 아니다. 상대의 깊은 화남이 담긴 한숨소리. 뚝. 이성이 끊겼다. 말도 없이 술을 마시고 몇 시에 들어온 지도 모르겠는데 아침 당번까지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적반하장식의 태도라니. 여러 번의 경고에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저 인간은 진정 아메바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그의 핸드폰을 집어서 던지고 빽 소리를 질렀다.


“술을 마실 거면 아침에 할 일을 하던가. 못하겠으면 술을 마시질 말던가.”

내 짜증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인간은 더 짜증을 내며 일어나 서 있는 날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때리려는 제스처.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나를 겁주기 위한 손짓. 옆에 서 있던 아기는 나랑 그 인간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를 겁 준 것만으로 만족했는지 그 인간은 세탁실로 갔다.  (사실 하나도 안 무서웠다. 너무 자주 본모습이라 나 역시 폭력을 행사할 듯한 분위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전날 입고 그대로 잔 옷을 벗으려는 모양이었다. 아기는 드디어 일어난 아빠를 졸졸 따라갔다. 세탁기에 몇 날 며칠 넣어져 있던 그의 옷을 바닥에 꺼내놓은 것을 보더니… (그 인간과 나의 대치는 꽤 오래 지속됐다.)


그 인간 또한 열이 받았는지 계속해서 열리는 세탁기 문에 주먹질을 해댔다. 욕지거리도 함께 내뱉는 것 같았지만 너무 놀라 들리지 않았다. 아빠의 폭력적인 모습에 아기는 울음을 터뜨렸다. 놀라고 있을 새가 없었다. 놀란 애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었다. 누가 당번이고 나발이고 난 아기를 씻기고 옷을 입혔다. 눈물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아기를 꽉 안았다. 내 표정을 본 아기는 아무 말하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히쭉 웃어 보였다. “분위기가 좀 그렇지?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등원을 마치고 무작정 차를 몰고 돌아다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울었다. 이제는 결정해야 했다. 내 아기가 이 분위기를 아는데 뭘 더 고민해야 할까? 그 사이 그 인간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짧은 두 번의 진동이 울리고 끊겼다. 나에게 보여주는 겉치레였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순 없었다. 반복되는 거짓말. 소통하지 않는 부부. 통보조차 없는 술자리와 귀가시간조차 모르는 일의 반복. 폭력으로 억압하려는 행동. 아이만 잘 봐달라는 약속의 불이행. 더 이상 버텨낼 힘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이를 안 보고 살더라도 내가 살아야겠다는 마음뿐이 없었다. 그렇게 집으로 갔고 미친 듯이 짐을 쌌다.


그 인간에게 오늘부터 집에 없을 것이니 알아서 아이를 챙기라는 카톡을 남겼다. ‘술이 원수’라는 피해자가 할법한 말이 담긴 답장이 왔다. 본인이 한 행동이 잘못된 일이 아닌 한 번씩 하는 실수라거 생각하는 인간이다.


이제 더 설명할 힘도 없다. 2023년 1월 5일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친정으로 갔다. 2% 부족한 모범생으로 살아온 내가 인생 최초로 벌인 최대의 돌발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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