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
전 7장 정심 마음을 바르게 하다
대학의 저자는 수신이 정심에 있다고 한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가짐이 발라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른 마음의 의미는 강렬한 감정 또는 극단적인 감정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 이른바 몸을 닦는 것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고 말의 뜻은, 몸에 강한 분노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두려움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걱정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
소위수신재정기심자, 신유소분치 즉부득기정, 유소공구 즉부득기정, 유소호요 즉부득기정, 유소우환 즉부득기정.
신유소분치身有所忿懥의 懥는 성낼 ‘치’, 有所好樂의 요樂는 즐거울 ‘락’으로도 읽고, 좋아할 ‘요’로도 읽는데 여기서는 문맥상 좋아할 ‘요’로 읽는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이런 화냄(분치), 두려움(공구), 좋아함(호요), 걱정(우환)과 같은 감정은 보통 마음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 몸에 있다고 했을까? 이런 문제의식은 옛사람들도 가졌다. 그래서 주자의 스승 정자는 몸 신身을 마음 심心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글자 모양이 전혀 달라서 잘못 쓸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 임의로 바꾸기보다는 몸 신을 쓴 이유를 더듬어 보는 것이 더 좋다.
몸에 화가 있고 두려움이 있고 좋아함이 있고 근심이 있다는 말은,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관점이 녹아 있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우리는 보통 화가 나면 몸이 아픈 경우가 많다. 마음과 몸은 이렇게 관계가 깊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강렬한 감정은 몸에서 느낀다. 이렇게 보면,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몸이라고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표현이다. 다만, 몸 체體라고 하지 않고 몸 신身이라고 한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체는 그야말로 물리적인 고깃덩어리의 의미다. 그러니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신은 몸가짐이라는 뜻을 가지면서 마음과 연결되는 통로 기능을 한다고 대학의 저자는 본 것 같다.
▶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보여도 보지 못하고 들려도 듣지 못하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
*마음이 여기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맹자에 나오는 구방심求放心(밖으로 나간 마음을 구해온다) 또는 존심存心(마음을 여기에 있게 한다)와 같은 말이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다고 해도 마음이 그 자리에 없으면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눈에 보여도 건성으로 보면 알아보지 못하고, 들리는 소리도 알아듣지 못하며,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이 어떤지 알 수 없다. 오직 마음을 기울여 보고 듣고 맛봐야지만 그것을 제대로 보고 듣고 맛을 알 수 있다.
이 문장에 대해 주자는 이렇게 풀이를 달았다. “마음이 여기에 있지 못하면 몸을 점검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군자는 반드시 마음을 여기에 있는지 살펴서 ‘경이직지’敬以直之(경으로 마음을 곧게 하였다.)하였다. 그러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게 되어 몸이 닦이지 않음이 없게 된다.
여기서 주자가 마음을 여기에 있게 하는 방법으로 ‘경이직지’라는 말을 했는데, 여기서 경은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이다. 그런데 ‘직지’ 直之 곧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윤리적으로 바름을 말한다. 『논어』 「옹야」 편에는 ”사람은 태어나면서 정직하니, 정직하지 않으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요행히 죽음을 면한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정직과 같은 뜻이다. 집중하되 ‘정직(직)’이라는 윤리를 지키지 않으면 그 집중은 악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집중은 중요한 덕목이지만 그 자체가 윤리적 선은 아니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집중하면서 선을 추구하는 것이 마음을 여기에 둔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