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이 하루를 시작한다. 남들은 회사에 나가 일과를 보내고 점심을 먹고 식곤증으로 꾸벅꾸벅 잠이 올 때 즈음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한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들과 같은 일상의 루틴을 갖고 지하철을 오르내리고 1시에 점심을 먹고 6시즘 퇴근을 했었는데, 내가 내키는 대로 밥을 먹고 책상에 앉고 하루를 보내는 게 낯설기도 하고 신 이나기도 한다. 너무 루즈해지는 건 주의해야 할 점이다.
곧 있으면 다시 규칙적인 사회로 뛰어들어야 함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현재 '내 마음대로 정하는 스케줄'의 하루하루가 참 재미있다. 2시 즈음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하루새에 어떤 이슈들이 있었는지 인터넷 검색어들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확실히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5분 남짓 검색을 하고, 어질러져 있는 책상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지금 내 책상 위의 모습을 묘사하자면, 이제까지 그린 그림들이 어지럽게 쌓여있고 새로 나온 옥수수맛 과자가 뜯긴 채로 놓여있다. 직접 만든 색연필 거치대에 색연필이 착착착 쌓아 올려져 있고 그 주위로 오일파스텔이 뒹굴고 있다. 작업을 할 때 필요한 물품 휴지, 물티슈, 필통, 가위, 테이프, 줄자, 빗(?) 등이 놓여있다.창 밖에는 겨울 낙엽이 달라붙어 있는 나무(프랑코, 나무 이름이다)가 1년 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집 안 거실을 들여다보고 있다.
1년이 지나는 시간 동안 혼자 살면서 확실히 느낀 것은, 내가 정말 무계획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일어나는 것도 잠에 드는 것도 한 번도 시간을 맞춰놓고 계산해서 한 적이 없다. 일도 마찬가지다. 그냥 하루를 보내다가 '이제 그림 좀 그려볼까?' 하면 그때 시작하는 것이다. 밤 12시가 지나고 그림이 쌓여가도 내가 '아 이제 그만하자'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만둔다. 지금은 다행히 '하루에 그림 1개는 꼭 그릴 것', '이틀에 한 개의 글을 꼭 쓸 것. 주말 제외!'라는 나만의 룰을 만들어놔서 예전보다는 나름 루틴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성향이 제주도에서 아주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그 날 또는 전 날 가야 할 곳을 정하는 즉흥적인 성향. 청량한 바다를 만나면 바로 숙소로 돌아가 수영장비를 챙겨 수영하곤 했다. 그것도 가을의 날씨에. 수영하는 사람이 오직 나 하나일 때 파도가 일면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아직도 그때의 일렁이는 바다가 온몸에 느껴질 정도로 항홀했다. 또, 예정에 없던 우도 여행을 가기도 했다. 제주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하늘과 풍경을 우도에서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내 성향이 가진 장점은예상치 못한 일상의 기쁨을 마주치는 것이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풍경을 상상치 못한 곳에서 경험한다. 내 계획과 예상을 벗어나는 아름다움은 언제든지 맞을 준비가 되어있다. 단점을 꼽자면, 큼지막한 계획조차 잡지 않는다면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예. 정말 아예 계획이 없으면 하루를 아무것도 안 한 채로 보내게 된다.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내가 그곳에 보러 '가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성향을 갖고 사회화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적응 중이다. 좋은 점은 키워내고 안 좋은 점은 버려내는 중인 것이다. 오늘도 오후에 일과를 시작했고 오후 4시가 되어서야 글을 마친다. 이제 그림 좀 그려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