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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일기장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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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숲 Jan 27. 2021

비를 맞아본 적 있던가

세화 마을

수평선 위 구름까지 내다보이는 화창한 날엔 왠지 두 손마저 가벼운 느낌이 든다. 날씨가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날. 비가 오는 날엔 우산 속으로 들어오는 빗방울도 피해야 하고, 물 웅덩이를 건너뛰려 큰 걸음을 내디뎌야 하고, 움켜쥐고 있는 가방이 비에 젖지 않게  꽉 붙들어야 한다. 우산 속으로 내 모든 것을 집어넣으려는 움직임이 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그럼에도 비가 오는 날이 싫지 않은 것은 땅에 떨어지는 물줄기가 주는 상쾌함과 비 맞은 날들의 기억 때문이다.

내 기억에 처음 흠뻑 비를 맞은 건 초등학교 때였다. 우산 없이 집으로 가는 길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건물에 들어가 비를 피할 수 있었지만 물놀이를 하듯 비를 있는 대로 맞고 싶었다. 그 순간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얼굴에 달라붙은 영화배우를 상상했던 기억이 난다. 그 환상은 얼마 가지 못했다. 건물 유리문으로 비취는 내 모습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감상에 젖어 비를 맞는, 꽤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재작년 친구 두 명과 춘천으로 여행을 갔다. 장마철에 간 휴가라 화창한 날씨를 기대하진 않았다. 춘천 이곳저곳을 돌기 위해 자전거를 빌렸다.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수락산 가는 것 마냥 편한 옷차림에 짐도 별로 없었다. 비가 올 것을 예상했었지만 막상 자전거를 탈 때 비가 오니 당황스러우면서도 은근 신이 났다. 우리 셋은 모두 들떠 있었다. 서른 넘어서 친구들이랑 비 맞으며 자전거를 탈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소나기가 오면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서라도 비를 피했다. 이렇게 비를 맞고 보니 왜 그렇게 애써 비를 피했는지 새삼 의아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서로를 '초딩'이라고 불렀다. 어린시절 했을 법한 놀이를 공유한 유대감 때문일 것이다.

어제는 가까운 아파트로 사진 출사를 갔다. 따릉이를 타고 갈 계획이었다. 따릉이 대여소에 가니 자전거 안장마다 물방울이 한가득 맺혀있었다. 비가 오고 있긴 했지만 안장까지 젖을 정도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참 단순해). 손으로 문질러도 물기는 그대로였다. 에이 모르겠다, 하고 자전거 안장에 앉아버렸다. 엉덩이가 조금 축축해졌지만 괜찮았다. 곧 마를 거니까. 자전거를 타니 비가 더 빠른 속도로 내 얼굴을 때렸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데도 괜히 사람들을 의식다. 나처럼 우산 없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저씨가 반가웠다. 예전 같았으면 모자라도 썼을 텐데 모자도 쓰지 않고 머리카락이 다 젖도록 두었다. 집에 가도 젖은 머리를 보고 '아이고, 우산 챙겨가지'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없어 그런 것 같다. 보슬비처럼 내리던 비는 얼마 안 가 그쳤다.

마땅히 해야 할 일. 비가 올 때 우산을 쓰는 일. 이것으로부터 벗어나 보니 소박한 해방감마저 들었다. '절대 비 맞으면 안 돼!'를 떨쳐버리니 그냥 비가 맞아지더라. '비 맞는 게 뭐가 그리 큰 대수였나'라며 대인배 흉내를 내보기도 한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해야만 하는 일들의 더미 속에 묻혀 지낸다. 더미 속 '이건 꼭 이렇게 안 해도 되잖아?'에 해당되는 것 하나쯤 찾아 나 좋을 대로 해보는 것도 좋겠다.

한라산

혹한기에 맨발에 슬리퍼 신고 밖에 나가보는 것, 눈 오는 날 반팔에 두꺼운 패딩 입는 것, 머리 감고 바로 나가 머리 고드름 생기게 두는 것 등(겨울이라 그런지 겨울 날씨 관련된 것만 떠오른다.) 정석을 따르지 않음으로 내게 묘한 해방감을 주는 것들이다. "어휴! 안 추워?" "응. 안 추워. 재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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