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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일기장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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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숲 Jan 22. 2021

머무르지 않아

제주도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 제주도에 있었던 게 한참 전이라 그런지 그때의 느낌을 글로 담아내는 게 쉽지가 않다. 그때 했던 고민이 지금의 것과 다르고 그때 느끼는 것들이 지금의 것들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도에 있을 때 다이어리에 이것저것 생각한 것과 느끼는 것을 적곤 했는데 다이어리를 집어 들고 다시 읽어봐도 그때와 동일한 감성으로 글이 써지지가 않는다. 고민의 제목은 동일하지만 그때의 것과는 다른 모양이 되었다.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모양으로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그게 해결되는 것이든 익숙해지는 것이든.

 '일'에 대한 고민은 비단 제주도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나의 20대 중후반을 휘감는 골칫거리였다. 20대 초반에는 일에 대한 고민보다는 놀 고민에 빠져있었다. 학생이라는 보장된 신분이 있으니 사회적 신분에 대한 압박이 없었다. 졸업한 이후에는 그 '신분'이라는 것 때문에 엄청난 압박을 느껴야 할 것을 예상도 못하고 멋모르고 놀러 다니기만 했다. 게다가 나랑 마음이 참 잘 맞는 친구 지숙이는 내 대학교 메이트였다.

맛집을 갈 때도, 시험기간에도, 수업 후에도, 점심시간에도 시간만 있으면 둘이 뽈뽈거리면서 놀러 다니곤 했다. 심지어 시험기간에는 시험기간이라는 것을 핑계로 학교 여자휴게실에서 밤을 새우며 수다를 떨곤 했다. 지숙이는 졸업 이후로 학습지 교사를 몇 년간 하고 떡볶이 집 사장님도 되었다가 현재는 청소년 진로설

계사가 되었다. 한 줄로 짧게 요약했지만, 그 한  줄 안에 20대의 진로에 대한 고민과 노력이 듬뿍 담겨있다. 지숙이는 확실히 공부를 잘하는 스타일은 아니다(나도 그렇고). 그런데 지숙이는 실패하지 않았다. 많은 도전 끝에 본인의 적성을 찾고 원하는 분야에서 자리를 잡고 일하고 있는 지숙이는 성공한 사람이다.

대학 졸업 후 취업전선에 뛰어들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고민했다. '내가 뭘 해야 하지?'.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도 같은 생각 들었다. 이 쪽 분야로 계속 직업을 갖고 사는 게 맞는 걸까? 토익 준비하고 스펙 쌓아서 상위 레벨의 회사에 지원하고 입사해서 회사에서 주어진 업무를 매일 똑같이 반복하는 일. 이 일을 정말 평생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하다가 또 했다. 고민하는 게 지쳐 포기하기도 했다. '그냥 조금 일하고 조금 버는 일 하면서 살자' 회사에서 일하는 것만이 정답이라면 그냥 조금 벌고 조금 일 할래. 하며 일에 대해 어떤 꿈도 꾸지 않았다. 작년에 퇴사를 하고 제주도를 갔다 왔다. 가는 중에도 가 있으면서도 오는 중에도 고민했다.

멈춰있는 같았다. 고민하는 모습이 주저앉아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뛰어갈 나는 자꾸만 뒤로 밀려나는 같았다.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머뭇 거리는 것처럼 보였고 의욕 없이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일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눈이 반짝이는 친구들이 신기했다. 생기 없는 눈을 하고 일에 대해 비전도 꿈도 없는 내가 나도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제와 돌아보니 난 멈춰있지만은 않았다. 부모님과의 다툼과 고민과 회피와 도전의 진흙탕에서 조금씩 앞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어휴. 지금에서야 이런 말을 하지 그때 당시에는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나만 괴로웠겠나? 지켜보는 부모님도 속 많이 쓰리셨을 거다.) 좋아하는 것이 없는 줄로만 알았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았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계속하다 보니 그것들로 내가 뭘 해야겠는지를 알겠더라. 뭘 해야겠는 지를 알고 나니 일에 대한 소망이 생기고 앞일을 계획하게 되었다. 모든 일련의 과정이 참 길고 복잡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사회의 방향에 반항하며 머리를 싸매고 진땀 흘리는 시간은 내게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불과 제주도에서 가졌던 여러 생각들이 지금 희미해진 것을 보면 그때보다 몇 발자국은 더 걸어왔다는 것이다. 1년 후에는 지금과는 다른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건 내가 그만큼 나아갔다는 것이다.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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