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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일기장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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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숲 Jan 15. 2021

즉흥적인 여행이 준 풍경

낯선 곳으로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이 주는 설렘이 있다. 내 경험에 국한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것만 같아서이다. 제주에 사는 친구, 이보가 추천해준 마을에 들리기로 작정했다. 처음 들어보는 지역에 무엇이 있는지 정보도 없었지만 이보의 '거기 진짜 좋아'라는 말 한마디에 무작정 목적지로 정하게 되었다.

이보는 행동에 망설임이 없고 모험을 좋아한다. 제주에 있을 때 몇 번 만났는데 그때마다 내게 새로운 경험을 시켜주었다. 바다낚시도 하고, 바닷가에서 삼겹살을 먹기도 하고(단연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삼겹살이다), 스쿠버다이빙도 했다. 실제로 이보는 내가 제주에 있는 동안 같이 낚시 다니는 어른들과 밤낚시를 가서 은갈치를 잡기도 했다. 나는 그때 다른 일정이 있어 참여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언제든 제주로 가서 '이보야 낚시하자' 한 마디면 '콜'을 외칠 것을 알았기에 기꺼이 다음을 기약했다.

어떤 마을이길래 그토록 아름답다고 하는 걸까? '사람들이 몰랐으면 좋겠어. 그럼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잖아. 그러니까 너도 어디 가서 여기 좋다고 말하지 마. 그냥 너만 좋아해.' 귀여운 아기가 더 이상 크지 않길 바라는 엄마처럼 이 마을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대하는 이보를 존중하고 싶었다. 그만큼 더 확실히 마을의 정취에 젖어들고 싶었다.

찬찬히 걸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숙소로 가는 길목이 조용하고 가지런했다. 요즘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햇살 내리쬐는 아침의 새소리 ASMR'의 배경일 것 같은 골목이었다.

어느 지역을 가든 명상할 수 있는 카페를 꼭 들린다. 그곳에서 4시간이고 6시간이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내겐 아침의 커피 한잔보다 훨씬 힐링을 주는 시간이다. 커피 한잔보다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기에 당연히 더 많은 휴식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4시간 같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생각하고 글 쓰는 일이 어느 누군가에겐 고통일 수도 있다. 이구(남자 친구)는 카페에 가서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몸이 근질거리는 사람이다. 어디 앉기만 하면 30분이 되기도 전에 '걸을까? 나갈까?' 라며 몸이 근질거린다는 신호를 보낸다.

몇 시간 동안 읽고 쓰는 행위는 발효식품처럼 나를 숙성시킨다. 가끔은 생각이 너무 많아 잘 익는 것을 넘어 쉬어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생각을 끊어내고 행동할 수 있어야 알맞게 익은 김치가 된다는 걸 이구를 통해 배웠다.

골목을 지나 '또' 이보가 알려준 카페에 들렸다. 앞바다를 마당으로 소유한 이 카페는 대저택 못지않은 그 만의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었다. 왜 '맛이 난다'라고들 말하지 않은가. 그야말로 맛이 나는 아늑함을 품고 있다. 사진 찍을 맛이 나고, 글 쓸 맛이 나고, 책 읽을 맛이 나는 곳.

카페에 오래 있을 작정으로 음료 한 잔과 디저트 한 개를 주문했다. 쑥떡에 아이스크림이 곁들여진 달달함. 유명 떡집은 찾아가서 먹을 정도로(그래 봐야 두 곳이지만) 떡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주 반가운 조합이었다. 한 접시 깔끔하게 끝내고 더욱 반짝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탐색했다. 화병마다 꽂혀있는 다채로운 꽃들, 엔틱 한 가구,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 가구들을 지나 보이는 바닷가. 카페 안의 모든 것이 자신의 매력을 아지랑이 피워내듯 일렁거리며 피워내고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일주일 동안 매일도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 날 이후 두 번더 방문했고 나머지 두 번은 처음 갔을 때만큼 날씨가 좋지 않아 처음 보았던 카페의 이곳저곳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스위스 어떤 마을의 카페(가보지도 않은)에 온 것처럼 그곳의 정취에 한껏 빠져버렸다. 그 날 무슨 책을 읽었고, 어떤 글을 썼는지,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그곳에 오랜 시간 머물고 난 후 내게 각인된 그 날의 기억은 숙성된 생각보다는 '온전히 혼자 보내는 소중했던 시간'과 '쑥떡 아이스크림 또 먹고 싶다'이다.

공기가 조금 차가워지고 해가 뉘엿뉘엿 지고 나 조차도 이제 한 자리에 앉아있는 건 못하겠다 싶어 짐을 챙겨 아까 들어올 때 본 마당의 그네를 타러 갔다. 한 커플이 웨딩사진을 찍고 있었다. 노을이 웨딩드레스를 타고 내 맨발의 발가락에도 일렁일렁 비췄다. 하얀 드레스는 노을을 받아 붉고 화려해졌다. 계획 없이 방문한 이 마을이 마침 취향에 딱 들어맞아 기분이 좋은 오늘을 마무리하기에 알맞은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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