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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일기장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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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숲 Jan 20. 2021

익숙해지는 여행

내가 카페를 이토록 좋아했던가? 서울에 있을 때는 커피도 안 마시고 카페에 쓰는 돈을 참 아까워했는데, 작년 제주에 있을 땐 참 많은 해변 카페를 다녔다. 아마 제주 동서남북에 있는 해변 카페 한 곳 이상씩은 가본듯하다. 카페에 앉아 일렁이지 않는 듯 일렁이는 바다를 보고 또 봤다. 제주에 있을 때 가장 좋아한 것이, 오후쯤 숙소에서 나와 주변 카페에 들어가 카페 문을 닫을 때까지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버스를 타고 숙소와 다른 동네로 이동해 관광지를 가보려고도 했지만, 영 몸이 그렇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대중교통은 숙소를 이동할 때 외에는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매일 숙소에서 걸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만 움직였다. 처음엔 '이래도 되나?' 싶었다. 내 사고 속의 여행이란 것은 자고로 많이 경험하고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내가 그런 생활패턴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루에 관광지 두 곳 방문을 목표로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케줄을 짜 놓고 움직였댜. 내가 그 스케줄을 소화했겠는가? 하하.

여행이 일처럼 느껴졌다. 스케줄을 소화하는 게 미션을 클리어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여행 자체를 즐기지를 못하겠는 거다. 그래서 계획을 짜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해보기로 했다. 처음 며칠은 숙소에서 한없이 뒹굴거렸다. 침대에서 핸드폰하고 책 읽고 일기 쓰고 낮잠 자는 게 왜 이렇게 행복한지. 하지만 결국 '뒹굴거릴 거면 왜 돈 내고 제주에서 뒹굴거려' 마음의 소리에 응답해야 했다. 

읽기로 한 책과 먹고 싶었던 음식 리스트를 들고나갔다. 처음엔 조금 멀리 떨어진 곳도 가보려 했지만, 돌아올 때 버스를 놓칠뻔한 이후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만 다녔다. 또 버스 타고 다니는 게 귀찮기도 했고. 이렇게 여유로울 수가. 어제 갔던 카페를 또 갔고, 어제 갔던 제육볶음 식당을 또 갔다. 안면이 익숙해진 식당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도 했다. 원체 낯선 사람에게 친근하지 않은 터라 아주머니와 사담을 나누는 내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한 번 안면을 튼 식당에는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 

어제, 엊그제 갔던 둘레길을 또 가고 어제 갔던 슈퍼에서 똑같은 과자를 또 사 왔다. 둘레길에서는 길을 헤매는 분에게 현지인인 것처럼 길을 알려주기도 했다. 며칠 지나면 지도 없이 동네 이곳저곳을 다닌다. 똑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대에 방문하면 전에 보지 못했던 색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청명하고 파란 둘레길 7코스의 바다가 다음날 노을 저물 때에는 따뜻한 겨울이불 같은 포근함을 준다. 

나의 여행은 익숙해지는 것이다. 풍경에 익숙해지고 동네에, 사람에, 맛에 익숙해지는 것. 새로운 곳을 매일 찾아다니는 것보다 익숙해지는 것이 내게 편안함과 쉼을 준다. 슬렁슬렁 동네를 걸으면서 지나치는 어제 보았던 버스정류장과 슈퍼마켓은 이제 지도 역할을 한다. '아 이제 버스정류장까지 왔으니까 여기서 오 조금만 더 가서 왼쪽으로 꺾자. 조금 가다 보면 슈퍼마켓 나오니까 거기서 새우깡 하나 사서 들어가야지.' 바다를 옆에 끼고 슬리퍼를 신은 발가락 사이로 바람을 맞으면서 새우깡을 들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내겐 행복한 여행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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