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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일기장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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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숲 Jan 11. 2021

나의 예술

마틸다


주말 오후, 가을 구름이 저 멀리 유유히 떠다닐 때 텐테이블에 80년대 LP를 틀고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는 모습. 나도 한 번쯤 상상해봤다. LP 한 장 없고 커피도 즐기지 않는데도. 턴테이블로 음악을 듣는 사람을 상상해보면 자신의 공간을 음악으로 채울 줄 알는 예술가나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여유시간에 감성적 취미를 즐기는 사람이 떠오른다(굉장한 편견이겠지?). 그들이 소유한 것만 같은 그 예술적 활동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마틸다식 컵받침

나는 구석자리를 좋아한다. 카페에 가도 이구(남자 친구)와 식당에 가도 내가 찾는 자리는 항상 가장 구석자리. 사람들과 내부를 관찰하면서 관찰당하지 않는 자리이다. 이구는 그런 날 잘 아는지 '좋아하는 자리 비었네?' 라며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일기장과 필기구, 책을 들고 제주의 LP 바를 찾았다. 구석에 조용히 앉아 떠드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음악도 듣고(무슨 노래인지 몰라도), 끄적끄적거리면서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다. 구석진 혼자만의 공간에서는 할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설레었다. 오픈 시간에 맞춰 기다랗게 줄을 선 사람들. 드디어 입장. 다행히 자리가 많이 비어있었고 구석진 자리로 향하려는 찰나. '이 쪽으로 오세요.' 하는 명쾌한 직원의 목소리. 내가 앉을자리는 다름 아닌 '바 자리'였다. '아니 이 곳은, 사람들에게

등을 내주어야 하는 자리잖아? 여기는 앞에 있는 빽빽한 LP판들만 구경해야 한다고!'라고 외치는 내면의 소리를 잠재우며 직원에게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도 괜찮겠냐고 여쭈어 봤지만 1인 손님은 바(Bar)에만 앉을 수 있다고 하여 바에서도 제일 끄트머리, 바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내 계획! 내 혼자만이 구석진 시간! 으아! 내적 탄식을 하며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는 사이 바 안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 북적이고 있었다. '아, 그래서 혼자는 바 자리만 되는구나'

마틸다


자리 바로 앞에는 손님에게 음악 리스트를 받LP를 틀어주고 음향을 조정하는 DJ가 있었다. 바로 앞에서 이런 풍경을 목격할 있다니. '혼자만의 구석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DJ의 현란한 손놀림에 대한 신기함으로 바뀌는 데에 오래 걸리진 않았다. 하나씩 주어지는 플레이리스트 주문서에 3곡의 음악을 적어 신청할 수 있다. 바쁘게 플레이리스트 종이가 쌓여가는 동안 나는 단 한곡도 정하지 못했다. 내 나름 리스트를 만들어 갔지만, 죄다 최신곡들 뿐이었다. 그렇다. LP 바에 앤 마리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것도 이상한 것이었다. 곡 신청은 뒤로하고 흘러나오는 노래와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내는 효과음을 즐기기로 했다. 원래는 가져올 책을 읽을 심산이었으나, 꺼내보지도 못했다. LP바에 와서 분위기 엄청 잡네 라는 소리가 뒤통수를 찌를 것 같았다. 물론 읽으라면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누가 직접적으로 따지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정도로 낯이 두껍진 않은 것이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을까. 음악만 듣고 있자니 엉덩이가 저려왔다. 글을 쓰고 책을 읽었어도 앉아있는 건 똑같은데, 왜 엉덩이가 찌릿찌릿 해 앉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아니야, 더 있어봐. 이 음악을 들으며 더 느껴봐 이 감성적인 예술을'. 꾸역꾸역 느껴보고 싶었다. LP 바를 나오며 이야! 이 환상적인 예술 활동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나도 턴테이블 하나 구입해야지. 라며 집으로 돌아온 주말 오후 턴테이블을 틀고 남들도 하는 예술을 만끽하고 싶었다.  

창문

그런데 엉덩이가 저릿한 순간 인정해야 했다. 그래, 나의 LP바에 대한 예술은 여기까지다. 확신이 든 순간 짐을 챙겨 바에서 나왔다. 그 이후로는 턴테이블에 대한 환상도 LP판에 대한 욕구도 사라졌다. 나중에 이구와 만나 헌책방에서 데이트를 할 때, 이구가 나에게 LP를 사주겠다고 했다. 그때 내 마음은 무척 고마웠지만 '그러던가' 정도였다. 새로운 문화와 사람들, 환경은 신기함도 주었고 호기심도 주었지만 이번에는 딱 거기까지 였다. 내가 관심을 가져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나 말고도 턴테이블이며 LP며 관심 있는 사람들은 널려 있으니 LP들이(?) 너무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의 예술에 집중해보니 또 다른 예술의 모습이 있었다. 감성적이고 창의적인 것뿐 아니라 나 스스로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나의 예술이다. 인격적인 말로 상대를 위하고 높이는 것, 사물을 색다 시각으로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 책임감 있게 회사의 예산을 다루는 것, 옳은 것과 좋은 것 중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등. 나를 자랑스럽게 하고 활력 있게 하는 나의 예술들. 나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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