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하지 않았다 (숨은 웃음 4)

퇴사를 생각하는 마음, 퇴사를 버티는 힘

by 미스트랄

오늘도 아침에 버스를 놓치는 사태를 겪었다.

지난 번 08:01분 지각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버스가 일차선을 유유히 달리며 내 앞을 지나갔다.


이번에는 버스 탓이 아니었다.

나는 분명 제 시간에 일어나서 꾸물거리지 않고 제대로 집을 나왔는데, 왜 6:34분이 되었는지.

내가 왜 2~3분의 타임 워프를 했는지, 영문을 모른 채 나는 서둘러 대책을 강구했다.

지난 번 지각 소동 때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머릿속으로 시뮬을 해 봤었다.

아무래도 성남역-수서역-왕십리역-청량리역은 좋은 대안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기운 다 빠져.


그래서 나는 눈 앞에 있던 전기 바이크를 집어 타고 10분 만에 버스를 쫓아가서 타 보기로 했다.

어제도 나는 4.2킬로를 천변으로 달려서 15분 만에 귀가했다. (멍 때리다가 내릴 역을 놓쳤다, 아 피곤해.)

10분 만에 2.4킬로 정도 해 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땅따라따땅! 전기 바이크 결제음이 났는데, 아 이런 시베리아! 바이크가 움직이지 않았다. 바퀴 고장이었다.

그래서 바로 포기하고 결제를 해버리고, 저만치 오는 버스를 잡아타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무슨 개나리 십장생인지 자물쇠가 고장나서 꼼짝도 안 했다.

오늘은 또 무슨 날이길래 아침에 이렇게 드립다 꼬이는 거여!

화가 나는 걸 넘어서, 지난 목요일을 떠올리자니 겁부터 났다.

오늘 아침이 꼬여선 안 돼. 절대 안 돼. 내가 반드시 풀고 말겠다!

나는 의지를 다지며 도가니가 간당거리는 내 무릎과 헐렁해진 코어에 힘을 뽝 집어 넣었다.


일단 한 정거장 더 먼 지하철역으로 오는 버스가 마침 왔길래 올라타기부터 했다.

앉아서 침착하게 앱으로 자전거 강제 종료. 내 돈 천 원 내놔. 별점 1개. 자물쇠도 고치고 바퀴도 고치라고 피드백 주었고.


그래도 이 와중에 희망적이게도 버스는 막히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무난하게 나를 정류장에 내려 주었다.

내가 타야할 버스는 지금 지하를 달려오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지하도를 달려서 지하철을 잡아 타기로 결심했다.

어제 본 강철부대 육군 팀장이 겁나 잘 달리던 걸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그러나 나는 늘 훈련으로 다져진 다리와 필시 뛰어난 운동 유전자를 지녔을 그녀가 아니었고,

내가 지하철역 승강장에 내리자마자 "문이 닫힙니다"하고 내 코 앞에서 문이 닫히고 말았다.

실망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내 나이 오십에 달리기로 승부를 걸어서 내가 타야했을 지하철을 구경이라도 했다는 것에 만족하며 다음 열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왕십리역에 내려서 청량리역까지 가게 되면 평소보다 6분 정도가 더 소요됐다.

청량리역에 하차하자마자 다시 뛰기 시작했다.

오늘 나의 도가니는 나의 것이 아니여. 회사에 바친다! 옜다 이거나 받아서 도가니탕이라도 끓여 내던지!

개찰구를 통과하는데 역무원이 한 노인분에게 "지금이 6시 44분이거든요"하고 설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원래 나는 6시 38분에 내려서 편의점에 들러서 그 날 먹을 거리를 사는데 오늘은 그냥 패스.

가장 가까운 전기바이크를 향해 냅다 달렸다. 앞으로 16분 (컴퓨터 부팅 등 시스템 접속을 생각하면 13분).

그래도 아직 승산이 있었다. 다행히 날이 맑았고 비가 내리지 않았다. 비가 왔더라면 그냥 다 포기다. 자전거를 탈 수가 없는 걸.


오늘은 1.5킬로를 7분 안에 타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출근계를 눌렀더니 07:59.

지난 목요일과 희비가 엇갈렸다. 7시 59분과 8시 1분은 둘 다 1분 차이건만 어쩌면 이다지도 크게 다르단 말인가!

오늘 승리의 요건은 청량리역에 도착했을 때 화장실에 안 가도 되어서가 아닌가!

오늘 수고한 내 도가니와 종아리 뿐만 아니라, 절대절명의 순간에 아프지 않았던 내 배에게도 이 영광을 돌리고 싶다!


자리에 앉아서 화장실에 가 손을 씻는데 등에 땀이 다 송글송글 솟았다.

전기 바이크 타고 땀 솟기도 쉽지 않건만. 아주 회사가 내 건강을 챙겨주고 있어.


글을 쓰면서 숨을 몰아쉬며 오늘은 왜 대체 내가 늦게 나온 걸까 생각하다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아침에 나는 아들에게 딸기를 챙겨주고 설거지감을 챙기고 나왔는데,

딸기를 씻어주다가 하나 입에 무심결에 넣었다.

신선하고 상큼해서 좋다. 빈 속에 이런 걸 넣는 건 참 괜찮네 라고 생각했고,

생수도 한 잔 귀하게 마시고, 아들도 먹였다. 아침 물은 밤새 쌓인 노폐물을 제거하는데 정말 필수적이다.

그러고선 나는 회사 나가기 전에 아주 자연스럽게 화장실에 다녀왔다. 배가 편안해졌고 속이 편안해졌다.

기상했을 때 피곤했던 나는 좀 상큼한 기분이 되어서 아들을 꼭 안아주고 집을 나섰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무의식 중에 화장실에 갔고(집이니까 마음 놓고), 그 바람에 버스를 놓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 덕분에 청량리역에선 화장실에 안 가도 됐고, 어쨌건 정시 출근에 성공한 것이었다.


이 아침의 변을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더 일찍 일어나봤자 소용도 없다. 이미 일찍 일어나고 있고.

새벽 6시에 일어나자마자 내 장이 당장 일하진 않는다.

내 장은 대충 6시 반에서 한 시간 사이에 일하는 습관이 배여 있다.

휴일 중에도 나는 7시에서 7시 반 쯤 깨어서 화장실에 한 번 갔다가 다시 단잠을 더 자곤 한다.

평일에는 꼭 회사로 이동하는 시간에 장이 일하겠다고 야단을 하는 것이다.

"아니 대체 무슨 회사가 이렇게 멉니까? 이 정도면 도착하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도 내 일을 하게 해 줘야죠?"

라고 내 장들이 데모라도 하는 것 같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집에서 장이 일했을 때가 차라리 낫다는 것. 중간중간 미친 듯이 뛰어야 하긴 했지만 출근 시간에 늦지는 않았다는 것.

도착지에서 장이 일하게 되면 필패라는 것. 중간이 어땠던 지간에 출근 시간에 늦게 된다는 것.


아침에 지하철 안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머릿속에선 곧 있을 뜀박질을 어떻게 완수할 것인가 시뮬을 계속 그려보면서) 전자책으로 MZ공무원이 20대에 딱 3년 일하고 퇴사를 선택해서 잘 살게 됐다는 책의 서문을 읽었다. 퇴근길에 잘 읽어볼 생각이다. 그 책 저자가 오늘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다. 필시 매일 원하는 시간에 화장실을 가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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