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테오 Jun 08. 2019

#5 위기였다, 당신의 손 끝에서 나를 보았다



적당함은 안락하다. 안락함은 위기다.
그렇게 위기가 시작된 걸 몰랐다.

10여년간 만난 운명같은 당신과는 잠정적으로 헤어졌다.
이렇게 쓰고보니 나 역시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같다. 나도 제대로 이별을 고하지 않은 채 늘 그렇듯이 갑작스럽게 떠났다. 이제와보니 이런 이별이 다행이었긴 하지만 말이다.



적당함의 매력에 빠져 당신을 만나기로 했다.


내가 이 새로운 당신을 적당한 배우자감으로 여긴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 나는 최소한 당신이 나에게는 성실하리라고 기대했다.

둘째, 나는 적어도 나를 보던 당신의 눈빛과 그 행동은 진실이라고 믿었다.

셋째, 나는 빈말을 하지 않는 그 신중함이 좋았다.

쓰고보니 이런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당신을 적당한 이유로 포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난 10여년이 넘도록 당신을 떠나지 못한 이유와 너무도 다른 게 이제와 보인다. 그 10여년 전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당신이 그냥 좋았다. 어떤 이유로 포장할 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새로운 당신은 이 적당함이란 조건에 맞지 않았다. 당신은 단 한 순간도, 내게도, 이 관계에도 성실한 적이 없었다. 당신은,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모두 내게 최종 선택과 결정을 미루어두었다. 당신은 신중한 게 아니라 우유부단한 것이었다. 이렇게 쓰고보니 당신은 지독한 회피형인간이었다. 나는 당신을 모르겠다.



Jean Béraud, Au Café, Private collection



두번째 만남에서 술을 마시기로 했다.


최근 들어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에게 애프터로 술을 마시자고 했다. 솔직히 나는 술을 좋아하며 적당하게 마신다. 못 마시는 척 하는 것은 사실 마시기 싫어서이다. 가끔씩 술이 달게 느껴지며 취하지도 않을 때, 너무 기분이 좋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면 더없이  좋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두번째 만나는 불편하며 낯선 사람과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청을 다 거절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찌된 일인지 당신과는 술을 마시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 같다.


두번째 만날 약속을 잡으면서, 그리고 잡고나서 좀 불편해졌다. 지금껏 애프터 약속을 하면서 이렇게 무심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첫만남과 두번째 만남 사이는 일주일 정도 텀도 있었다. 처음 만난 날에 다음 약속을 잡으면서, 그리고 두번째 약속을 잡으며 그렇게 단 두 번만 연락을 했다.

바쁘다고 하니 여기까지는 이해하기로 했다.

요일과 시간을 정했을 뿐이었다. 당일 낮 12시가 되도록 장소에 대한 연락이 없었다. 심지어 메시지를 남겼는데도 답이 없었다.


인연이면 기다리게는 해도 지치게하지 않는다고 한 말을 계속 되뇌였다. 충분히 지쳤다. 약속을 더 기다리지 말고 없던 일로 하려고 했다.


그 찰나에 전화가 왔다. 약속장소를 정해줬다.

소주를 먹자고 했다. 화가 녹았다. 새삼 반가웠다. 


이쯤되면 내가 다중인격 같은데 그랬다. 다중인격이었다. 당신과 만나는 동안의 나는 다중인격이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였다. 비록 당신 앞에서는 순한 양이었지만 말이다. 쓰고보니 이것도 실수였다. 당신 앞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


일을 마치기 전부터 소주를 함께하기에 적당한 모습으로 단장을 했다. 심지어 평일에는 하지 않던 화장까지 하려니 더 귀찮았다.




그때 나는 적당한 당신에게 홀렸다.


만나기 전엔 불쾌함이 있었으나 이상한 기대감도 있었다.

당신을 만나니 이상하게 그저 반가웠다.

두번째 만나는 여자에게 소주를 마시자고 한 것이 낭만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소주를 함께 마시자고 한 것부터 당신은 정말이지 몹시 매우 적당했다.


사실 당신이 소주를 마시자고 했을 때, 당신의 이야기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말 못한 일들이 있나 싶었다. 곧 마흔인 남녀에게 말 못한 일들이 몇 개쯤 있어도 상관없다 싶었다. 나는 그 어떤 이야기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신은 내게 지나온 삶의 단편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 조각들은 중간 중간 비어있었다.

나는 묻지 않았다. 고작 두번 만난 낯선 여자에게 힘들었던 지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내 시선은 당신의 손 끝에 닿았다.


곱게 자랐으나 말 못할 사연이 한 두개쯤 있는 사람의 손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손은 나이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겉은 매끈했지만 그 안은 쉴레가 그린 자화상 속의 손보다 더 상처투성이였다.


그 뭉툭한 손끝은 말했다. 당신이 힘들게 살았음을. 당신의 상처는 내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 깊다는 것을.


Egon Schiele, Self-Portrait with Lowered Head, 1912, Leopold Museum, Vienna



나는 그 손끝에서 나를 보았다.


당신과 내가 긴 시간을 돌아 만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걸어온 길이 당신에게로 향해왔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당신을 운명으로 믿어보려고 노력했다.

그 이후로 지난 달 동안 당신은 내게 운명이었다.




이렇게 쓰고보니 내가 세상에 둘도 없는 쓰레기 같다. 그 오랜 사랑을 한순간에 버렸으니까 말이다.

사실이다. 지난 몇  간 나는 하찮은 쓰레기보다 못 했다.

나는 이제 막 만난 당신을 운명으로 믿으면서 나를 잃어버렸다. 그렇게 나를 잃었다. 그리고 최악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아니 당신과 함께한 거의 모든 순간은 위기였고 지옥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4 위기인가 기회인가, 적당한 당신에게 끌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